성준은 산을 홀로 내려가며 투덜거렸다.
"아니 내가 이 나이가 돼서 심부름이나 하러 다녀야 하냐고, 그것도 다 늙은 중년 아저씨의 러브레터나 들고서. 참 쪽팔려서 진짜. 에잇 그냥 골드바 하나 들고 튀어버리기엔 좀 아쉽기도 하고... 저번에 내려가다 보니 이거 뭔가 잘못된 거 같기도 해서 좀 불안하기도 하단 말이지. 일단 그것부터 제대로 해결하고 나서 도망을 가든. 금괴를 챙겨 튀든 해야겠다. 일단은 말 잘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에이... 모양 빠지게 말이야"
첫 번째 심부름으로 장 씨를 만나러 가는 길 성준은 죽을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 어쩌다 안개를 담아서 목숨을 건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쉽게 산을 벗어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커다란 텀블러에 안개를 가득 담아 왔다. 아직까지 얼마나 필요한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성준도 잘 모른다.
저번에 한 모금을 들이켰을 때는 두 시간 정도 버틸 수 있었다. 그때는 내려갈 때 한 번, 올라올 때 또 한 모금을 마시고 겨우 살아왔다. 산을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몸이 이상해졌다. 저번에 찔렸던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피가 났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갈수록, 정확히는 안개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상처가 아물고, 고통이 잦아들었다. 안개가 포인트인 것 같다. 아마 이곳 사람들도 안개를 벗어나면 가지고 있던 병으로 고통받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모른다. 일단 성준이 넘겨짚은 것은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김호열 아저씨의 그녀는 이곳 경산시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에서 산다. 내려가는데 두 시간, 장 씨의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한 시간, 버스 타고 두 시간, 아줌마의 가게를 찾고 편지를 전하는데 1시간, 대략 편도로도 6시간 정도 걸린다. 왕복 12시간이다. 다행히 목적지는 자신이 이제껏 다니지 않았던 도시다. 성준을 쫓고 있는 사람들 걱정은 덜해도 될 것 같다. 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까딱 방법을 찾지 못하면 여기 시한부 노잼 인간들과 한평생을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막막하다.
그러다 불과 며칠 전 죽으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햐.. 사람일 모른다더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참... 모르겠네.. '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두 시간마다 꼬박꼬박 안개를 마셔주면 별 탈없이 움직일 수 있다. 아니 배도 고프지 않고, 지치지도 않다. 이걸 가져다 파는 게 더 부자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 실례합니다. 여기 사장님 계신가요?"
"예~ 제가 사장인데요.. 누구.. 신지요? "
"저... 김호열 씨라고 아실까요? "
"누구요? 김호열이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혹시 여기 자주 오시고, 타일일 하시던... 50대 정도 되신 분인데 체격 좋으시고... 모르세요? 사장님이 바뀌었나요? "
"저... 혹시 김사장님인가? 제가 성함은 잘 모르는데 그분인가요? 체격 좋고, 잘 생기신... 아니... 착하게 생기신... 혹시 그분을 아세요? "
'뭐야 이 아줌마... 김호열 그 아저씨는 우락부락에 체격만 큰데 딴 사람 착각하는 거 아냐? 뭐? 잘생겨? 착해? 이상한데?'
"저.. 쉬시는 날 만나기로 하셨다던데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아이고 참 별 이야기를 다했나 보네... 그 사람 알아요. 우리 단골이었죠.. 네 만나기로 했는데... 바람맞았어요. 참나. 내가요 그래도 어디 가서 채여본 적 없는데 말이죠. 어디 산적 같은 놈이 착해 보이길래 밥 한번 같이 먹을까 했더니.. 무슨 일이래 다음부터 아주 코빼기를 안 보이고 줄행랑을 쳤더라고요. 그 뒤로는 어디서 보이지도 않아요 못난 사람"
"저... 여기 그분이 전한 편지가 있어요"
"편지요? 아니. 그분 어디 계신지 아세요? 잘 살고 있나요? 갑자기 무슨 바람으로 편지래요... 이제 와서.."
식당 주인은 성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마주 앉아서 편지를 읽었다. 원망 가득했던 눈빛으로 읽기 시작하던 편지는 이내 눈물을 떨구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제 들었던 데로 라면 다시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식당 여주인은 휴지로 코를 팽하고 풀더니 말을 성준에게 물었다.
"그 사람.. 암이라고요.. 그랬네요... 몰랐어요.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매일 저녁을 그 사람이 오면 좋아할 반찬들로 만들고 기다렸거든요. 처음부터 맘에 들었어요. 여기 식당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사람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으러 온 적이 있었죠. 우연히 부모님을 모시고 그 나이까지 장가도 못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착한 사람이다 싶었죠. 저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봤지만 쉬운 일이 아닌던데... 사람이 참 괜찮타 싶었어요. 얼마 안 있다가 두 분 다 돌아가시고는 혼자 밥을 먹으러 오더라고요. 그냥 티브이 보거나, 핸드폰을 보면서 밥을 먹는 모습이 좀 안되어 보였어요. 이제 저 사람은 혼자구나 싶더라고요. 주변에 누가 챙겨줄 사람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뭐 그래도 지저분하게 다니지 않고, 예의 바르고, 암튼 호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글쎄 저한테 시간을 달라지 뭐예요. 얼마나 놀랬던지. 심장이 쿵쾅쿵쾅 하는데 맘과는 다르게 말이 모질게 나가는 거예요. 쉽게 보지 말라는 둥, 헛소리하지 말라는 둥,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죠.
그렇게 보냈더니 한동안을 가게에 안 오더라고요. 이 사람이 언제 다시 오려나 평소 싹싹 비우던 반찬을 많이도 만들어 두었는데 통 안 와요. 못났다 싶었는데. 저기 전봇대 뒤에서 몰래 엿보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돌아서 피식 웃었죠 뭐.. 며칠 있으면 다시 오겠구나도 싶었고요.
그리고 정말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다시 왔어요. 반가웠죠. 더 잘생겨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밥도 많이 주고, 반찬도 많이 줬어요. 계란 후라이도 하나 얹어주고, 천천히 먹으라고 물도 떠 주구요. 그리고 돌아오는 월요일날 만나기로 했어요. 내가 그날 입고 가려고 큰맘 먹고 옷도 새로 샀다니까요.
월요일인데.. 그 사람이 안 왔어요.. 아니 그 계란후라이를 해주던 그날 이후로 그 남자를 못 봤어요. 무슨 일이 났나 싶었죠.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답답하긴 했죠. 인연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제 와서 줄행랑을 치나 야속하기도 했죠. 참 원망도 많이 했는데..
편지 읽어 봤나요?"
"아니요.. 읽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나요? 다시 만나고 싶으시다고 하시나요?"
"아니요. "
"그럼.. 무슨 말을 하시려 편지를 쓰신 건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정말 데이트하고 싶었다고 하네요. 고마웠다고요. 그동안 따뜻한 밥 맛있게 먹었다고 하네요. 못난 사람. 나야 돈 받고 밥장사한 게 단데 그걸 뭘 고맙다는지.. 그 사람 많이 아픈가요?"
"... 네... 아마도.."
"저기 그 사람에게 전해주세요. 나도 정말 데이트하고 싶었다고요. 그냥 그렇게만 전해주세요.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네.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성준은 인사를 건네고 식당을 나왔다. 성준이 떠나고 식당 주인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쉽기도 하고, 남자의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만약 데이트를 하고, 함께 인생을 함께 한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일이지만, 그와 함께 살아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면 그래도 웃음이 났다. 어쩌면 자신도 많이 좋아하고 의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의 남은 시간이 조금은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가벼운 심부름이라 곧 해치우고 즐겁게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성준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성준은 문득 수민이 생각이 났다.
함께 보육원에서 자란 동급생. 스무 살이 되어 함께 보육원을 퇴소하고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녔다. 성준은 그녀를 동경했다. 좋아했다. 자신을 이해해 줄 것 같았고, 무엇보다 항상 올곧은 그녀가 멋져 보였다. 둘은 종종 연락하며 서로 안부를 챙겼다. 서로에게 가족 같은 존재였다. 성준에게는 첫사랑이었다.
형들과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길을 걷다 우연히 수민과 친구들을 만났고, 성준은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손짓하며 아는 체를 했다. 그녀는 성준을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그녀 옆의 친구들의 두려워하는 눈빛과 경계하는 눈빛을 성준은 잊지 못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부끄럽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수민의 친구들에게서 받은 눈빛은 성준의 지난 시간들을 모조리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성준은 그 뒤로 그녀를 찾지 않았고,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 그녀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예~ 그랬다구요 아저씨랑 정말 데이트하고 싶었데요. 옷도 새로 샀다고 했어요. 아저씨한테 잘 보이려고요. "
"정말? 그래? 그랬다고? 그리고.. 어땠어? 잘 지내는 것 같았어? 어디 아파 보이지는 않고? 여전히 예쁘더냐?"
"예~ 예~ 아주머니가 곱더라구요 아주. 반할만하시던데요? 그런 아주머니면 곧 새로운 인연 만 나시 겄던데요... 앗!. 뭐. 그럴 수도 있다구요."
"...... 그래. 아마 곧 그럴 거야. 그 사람 좋은 사람이거든. 곧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암. 그래야지."
"아이 그건 그냥 내가 헛나온 소리고.. 참 아주머니가 아저씨 그동안 고생 많았대요. 아저씨한테 그렇게 전해달래요"
"...... 응. 그랬지. 고생 많았지.. 너도 고생했다. 고마웠다. 이제 좀 속이 후련하네. 그동안 뭔가 꽉 막힌 것 같았는데. 이제는 좀 시원해. 음.... 후~~~"
김호열 씨는 잠시 혼자 있겠다고 했다. 숲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어깨를 들썩이는 폼이 울음을 참고 있는 모양일지 모른다. 아무렴 어떨까. 이런 때 조금 창피하면 어떻고, 조금 볼썽사나우면 또 어떨까. 어쩌면 생의 마지막으로 원했던 일 하나를 완수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휘적휘적 걸어가는 호열 씨의 발거음이 예사롭지 않았고 그 길이 김호열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