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봐 이 놈은 달라.. 이거 보라고.."
"어이쿠 다르면 큰일인데... 이거 꽤나 아프겠는걸?"
"아이고 이거 어째요... 괜히 엄한 사람만 고생시키네.."
다들 안타깝다는 말을 하지만, 눈은 묘한 기대감과 광기로 반짝반짝 해졌다. 마치 탐스런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이 이럴까? 성준은 김 씨가 찌른 칼날을 손으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성준의 손은 허공을 휘젓고, 칼날은 왼쪽 옆구리로 곧장 날아들었다. 성준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뺀 덕분인지 칼은 깊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성준의 왼쪽 허리는 피로 붉게 물들었고, 성준은 흙바닥으로 쓰러졌다.
"뭐여... 안 일어나? 야야.. 못 일어나겠어? 아퍼?"
이런 개같은 경우가 있을까? 자신이 찔러 놓고는 아프냐고 묻는 싸이코가 있을까? 성준은 혼미해지는 가운데 김 씨를 노려보았다. 저... 저놈 내가 죽인다 저거.... 악다구니를 쓰고 싶었지만, 배에 칼이 스치니 헉헉 거리기만 할 뿐 한마디 말도 못 하게 아팠다. 영화는 다 거짓말이다. 칼을 뽑고 반격한다? 완전 거짓말이다. 그냥 죽을 거 같기만 하다.
"남 씨 거기 그것 좀 가져와봐..."
"여기요.. 내가 하나 챙겨 놓은 게 있긴 한데.. 이게 이 사람한테 통하려나 모르겠네요"
"뭐 장기사 말대로 테스트다 생각하고 한번 해보지 뭐... 어차피 죽으려 온 놈이라는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뭐 목적은 달성했응께.. 된 거지 뭐.."
남 씨는 김 씨에게 작은 유리병을 하나 건냈다. 액체는 아닌 것이 뿌옇게 유리병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물에다 반짝이는 보석가루를 타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어디 뿌연 연기를 채워 넣은 것 같기도 했다. 김 씨는 뚜껑을 열고는 성준의 손을 홱 치웠다..
"으.. 윽... 아이씨.... 헉헉"
성준은 숨만 몰아 쉴 뿐 저항 한번 못했다. 김 씨는 성준의 옷을 들어 올리고는 상처에 유리병 안의 것들을 쏟아부었다.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흘러내리듯. 병에서 뿌연 연기가 쏟아져 나와서는 성준의 상처 위에 소용돌이친다.
성준은 머릿속까지 찌릿한 느낌이 팍 들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한 밤중이었다. 어제보다 더 밝은 달이 눈에 박힌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들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잉... 잘 잤는가.. 그래도 안개는 효험이 있긴 있나 봐. 이건 통하네."
"그러게 일단 알아두자고. 안개는 통한다."
"그럼 다음 단계는 뭘 하면 되지? 일단 장 씨한테 그 물건을 받아오라 캐야지.."
"그러면 될까? 하긴 그게 좋겠네.."
이 인간들이 사람을 칼로 찔러놓고는 뭐라고들 떠드는 건지. 도망이고 나발이고 사고 한번 쳐야겠다 마음먹었다.
여기 상처만 아물어봐라. 그날로 내가 한놈 한놈 찾아가 복수할 테니까. 중얼거리며 왼쪽 아랫배에 상처를 더듬었다.
"응?? 뭐야 이거?"
어느새 성준의 상처는 아물었고,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고통을 예측하고 미리 윽하고 낮은 비명도 준비했는데 멀쩡히도 잘 일어났다. 아프지도 않고, 아니 이미 상처 자체가 다 아물어버렸다.
"이거.... 뭐야 도대체...."
"앉아봐. 몸은 멀쩡 할 테니 엄살 피울 생각은 말고, 자네 여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 이제 실감 나지? 여기가 그런데야. 그러니까 자네가 우릴 위해 무얼 좀 해줘야겠어."
"아니.. 안 해.. 뭐가 됐든 난 안 해. 나 건들지 마. 나 조용히 지내든가. 죽어줄 테니까. 나 건들지 말라고. 자꾸 나 귀찮게 하면, 그냥 다 같이 가는 거야. 니가 죽든 내가 죽든 아주 끝을 볼라니까. 그런 줄이나 알라고."
"50억이야."
50억? 숲이 빽빽한 곳에 푸르스름한 달빛을 바라보는 운치 있는 곳에서 듣는 50억이 이리도 낯설고 달콤할 수가.. 성준은 잘 못 들었다고 믿었다.
"뭐 개소리야. 뭐? 돈을 준다고? 돈이 있기나 하시고? 어디 다들 노숙자 저리가라 다들 똑같은 옷들만 입고 있구먼, 딱 봐도 전재산 여기 기부하고, 오두막 하나 분양받은 거 같은데 괜히들 허세 부리지 마시고 각자 길들 갑시다. "
"그럼 일단 이거 하나 받아."
툭..
성준의 발치에 묵직한 녀석이 하나 떨어진다. 달빛을 받아 영롱함이 반짝거린다. 성준에게 별 인연이 없는 물건이지만 저것이 무엇인지는 성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제껏 실제로 보고 만져본 적은 딱 한번 큰 형님의 심부름으로 금고를 정리할 때였다. 작은 녀석이 어찌나 무겁던지. 그 무게감에 놀랐고, 생각보다 영롱한 색에 반했다. 가지고 싶었다. 저런 녀석을 몇 개만 가지고 있어도 성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일단 하나 받고, 앞으로 우리 심부름 하나당 그거 하나씩 챙겨줄게."
"심부름 하나 할 때마다 하나? 이거 하나에 얼만 줄이나 알고나 하는 말이야?"
"뭐 요즘엔 1억쯤 하려나? 한참 오른다는 거 같긴 한데... 영 소식을 듣기 힘드니 뭐 그 언저리 가격쯤 하겠지 뭐"
"이거 하나에 요즘 1억 3천이에요 1억 3천!!!"
"그니까. 그거 하나씩 준다니까? 우리 심부름 하나씩 해주면.."
"일단 이거는 내가 갖고? "
"그거 자네가 해! 어차피 여기선 쓸 일도 없어. 참.. 일단 장 씨한테 가서 물건 하나만 받아와 봐. 장 씨는 자네가 타고 온 택시기사야.. 이 봉투 장 씨한테 주고, 챙겨주는 거 잘 받아서 돌아오기만 하면 돼. 그럼 이 골드바 자네 줄게."
"뭐야... 이거.. 무슨 사기지? 그런 일정도로 골드바를 준다고? 어디 사람을 호구로 아나.. 뭐야 이거 가짜야? 어디서 약을 팔아! 날 뭘로 보고"
"이봐 젊은이. 잘 들어. 여기는 오지 숲 속이고, 우린 어디 갈 데가 없어. 자네가 택기기사한테 뭘 받아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이 금괴가 가짜라 해도 자네는 잃을 것도 하나 없어. 그리고 우리가 자네를 속여 무슨 이득을 얻겠다고 사기를 쳐. 오히려 자네가 받아 올 수 있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못하나? 그래서 그런 대가를 지불한다는 생각은 안 들어? 우린 투자를 하는 거야. 자네가 그럴 자질이 있는지 아닌지. 아니면 우리 서로 각자 길 가면 돼. 어때? 할 거야? 말 거야?"
"노인네. 사람 입을 막는 재주가 있네 아주. 택시 기사한테 받아만 오면 된다는 거지? "
"그래 일주일 안으로만 받아오면 돼, 빠를수록 좋아. 이틀 안에 돌아오면 이걸 하나 더 얹어줄게"
"이거 더 수상한데... 내가 모르는 뭐가 있는 거야? 아니 뭐가 있긴 있는데?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거액을 지불한다... 보자... 뭐... 생각은 있지만 일단 갔다 와서 말하기로 하지. 지금 갈 테니 약속이나 지키셔... 아저씨 아까 내가 준 명함이나 돌려줘. 거기에 전화번호도 있던데.."
"그거 필요 없어. 올라온 철제 대문만 지나면 장 씨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못 만날 일은 없어. 돌아오는 게 문제지.. 뭐.."
성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되돌아갔다. 소풍이라도 나온 듯 깡총거리며 잘도 산을 내려갔다.
"저거... 저... 돌아올까?"
"뭘 기대를 해... 언제 돌아온 놈 있었어? 괜한 기대들 하지 말어"
"그래요. 기대는 안 하는데 젊은 양반이 좀 안되긴 하네요."
"뭐 죽으려 자리 잡고 온 놈이라는데 장소만 달라진 거지 뭐.. 목적 달성했으니 뭐가 아쉬울까. 돌아오지 못할 거고. 만약 돌아온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다들.."
총 10명의 사람들이었다. 성준이 내려가는 그 길을 물끄러미, 한참을 지켜보다 각자 저마다의 집으로 들어가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그 젊은이가 돌아오면 무엇을 부탁할지. 예전부터 원하던 일 중 한 가지만 꼽아 보기로 했다. 못 오겠지만 돌아온다면. 부탁하리라 마음먹었다. 다들 남몰래하는 응원이었다.
"어이~ 꼰대들~! 골드바 내놓으라고..."
성준은 고작 이틀 만에 돌아왔다. 솔직히 거리야 하루면 갔다 오고도 충분할 거리지만 돌아온다는 것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던 주민들은 성준의 귀환에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그 자체를 믿지 않았다.
"자네 정말 장기사를 만나고 온 거야? 그냥 다녀온 척만 한 거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을 하려고 해. "
"아니 이 사람들이 사람 죽을 고비 넘겨가며 다녀왔건만.. 못 믿어요? 아... 나한테 뭐 받아 오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거 내가 보여드릴게요.. 어딨 더라... 자... 이거잖아 이거."
성준은 또 검은 비닐봉지에서 작은 인형 하나를 꺼냈다. 초등학생 소녀나 안고 다닐 법한 테디베어 곰인형이었다. 군데군데 낡은 모양새가 아마 새것은 아닌 것 같다.
"뭘 이런 걸 받아 오라 시키는지 이왕이면 골드바 이런 거나 더 받아 오지 고작 인형 하나 받자고 나를 거기까지 다녀오라 해요? 암튼 나 심부름 하나 했으니 이 골드바는 이제 내겁니다. "
"자... 잠깐만... 일단 확인을 좀 해보고.. 기다리라고.. 희수야.. 이거 맞니?"
그곳엔 아이도 있었다. 나이가 열 네댓 살쯤 된 아이가 어른들 사이에서 나와서는 이리저리 곰인형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발바닥에 쓰여 있는, 이제는 낡아 거의 보이지 않는 '장희수'라는 이름을 확인했다.
"네.. 맞아요 이거 제 인형이에요"
"거봐 맞다잖아. 내가 거짓말하겠어? 나 그거 가지고 오는 데 아주 죽는 줄 았았다고. 무슨 일인지. 산 아래로 내려갈수록 숨도 안 쉬어지지, 갑자기 몸살에 오한에 갑자기 찔렸던 상처가 벌어지질 않나. 다시 아물지를 않나. 아주 별 이상한 일들을 다 겪었다고."
"그.. 그래서.. 어떻게 그 아래까지 내려간 거야? 응? 말 좀 해봐!"
"왜 그거 있잖아. 아저씨가 나한테 주던 거 그거. 그거 때문에 살았지 뭐"
"안개를?? 그걸 어쨌는데?"
"그냥 병에 담았어.. 몰랐는데 여기 주변은 항상 옅게 안개가 있더라고..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안개가 있는 곳에서는 멀쩡한데 그곳만 벗어나면.. 이상하게 몸이 아파와. 상처도 덧나고.. 그래서 혹시 몰라서.. 안개를 생수통에 하나 담아서 내려가면서 마셨지 뭐.. 그랬더니 괜찮던데?"
"안개를 담았어? 너 혼자? "
"뭐... 담았다고 말하면... 뭐.. 그렇지 뭐..
웅성웅성 떠들던 주민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그가 안개를 담았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희망이 남아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성준을 제외하고 모두 각자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들끓어 오르지 시작했다. 오직 성준만 반작이는 금붙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의 눈빛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