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교과서를 펼쳤다. 손에는 형광펜이 들려 있었고, 페이지 곳곳에 깨알 같은 필기가 빼곡했다. 몇 정거장 동안 옆에서 지켜봤다. 아이는 단 한 번도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다. 집중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는 지금 이 공부가 재밌을까? 아니면 해야 하니까 하는 걸까.
아이들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른다. 아니, 정확히는 왜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공부 좀 해"라는 말은 수없이 듣지만, 정작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답은 막연하다.
"나중에 도움이 돼."
"기본은 해야지."
"좋은 대학 가야 하잖아." 하지만 아이들은 그 말이 와닿지 않는다.
어느 날 저녁, 아이가 숙제를 하다 말고 투덜댔다. "엄마, 이거 배워서 어디 써먹어?"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나중에 다 도움이 돼."라고 말했지만,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아이는 이 공부가 진짜로 필요하다고 느낄까? 아니면 그저 어른들이 시키니까 하는 걸까.
부모 세대에게 공부란 곧 '성공'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을 얻을 확률이 높았고, 안정적인 직장은 곧 행복한 삶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쉽지 않고, 직장을 얻어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온다. 공부, 어디까지 중요한 걸까.
학교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성적을 신경 쓰는 건 어쩔 수 없다. 부모는 현실을 알고 있다. 성적이 좋으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아지고, 기회도 넓어진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걸 모를까? 아니다. 이미 학교에서, 친구들에게서, 사회에서 충분히 배운다. 부모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성적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공부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맞다. 그런데 우리는 또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도 기본은 해야지." 그리고 여기서부터 부모와 아이의 생각이 갈라진다. 부모는 '기본'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기본'의 기준이 다르다. 성적이 기본인가?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게 기본인가?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가는 게 기본인가.
어른들은 종종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기준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우리가 자랄 때와 다르다. 부모 세대에게 공부는 '좋은 대학 - 안정적인 직장 - 성공적인 삶'이라는 공식을 따라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AI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고 있고, 대학 졸업장보다 실력이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다. 누군가는 유튜브를 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게임을 개발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그렇다고 공부가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최소한의 지식과 상식은 필요하다. 적어도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려면 기본적인 배움은 필수다. 단순히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공부는 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의 교육 시스템이 그걸 충분히 제공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어느 날 밤, 아이가 시험지를 들고 왔다. "엄마, 나 이번에 80점 맞았어."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 그래도 90점 넘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해버렸다. 아이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내 말이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넌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왜 못했어?" 나는 아이의 노력을 인정해주고 싶었는데, 결국 점수에 대한 얘기로 끝나버렸다.
부모는 고민한다. 공부를 강요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기본은 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적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시험 결과에 따라 기분이 바뀐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한다. 모순이다. 하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성적을 높이는 게 아니라, 아이가 공부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
부모가 책을 읽고 배우는 모습을 보이는 집에서는 아이도 자연스럽게 배움의 가치를 깨닫는다. '공부해'라는 말보다, '나도 이거 새로 배워봤는데 재밌더라'는 말을 건네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부모가 먼저 배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날 아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엄마, 나 이거 재미있어. 더 해보고 싶어." 그 순간이 오면, 공부는 더 이상 강요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는 '행복한 공부'의 모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