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나눈 오늘의 마음이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길.
어떠한 형식이든 약속이란 자고로 서로의 관계에 지속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돈을 갚겠다는 계약도, 다음 주에 저녁을 먹자는 빈말도, 피아노를 연주해주겠다는 기세 좋은 약속도,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하자는 다짐까지. 약속이란 너와 나의 관계를 미래로 길게 잇는 일인 것이다.
약속을 가볍게 습관처럼 뱉는 사람, 그리고 혹시나 미래에 책임질 일이나 비난받을 일이 생길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약속의 말을 회피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을 더 신뢰해야 하는지 여지껏 아리송한 까닭은 머리와 마음이 각각 서로 반대쪽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약속은 개인 간의 약속에 그치지 않는다. 약속에 요구되는 언어의 이면에 있는 것이 약속의 진정한 정신이다. 예를 들어 '내일 5시에 만납시다'라는 일상적인 약속의 경우일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5시의 업무적인 만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 서로 위안을 주고 신뢰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인연의 확인, 상대에 대한 배려 등 많은 약속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맹세라 말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렇게 일상적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는 당연히 곧 시들해지기 마련인데, 이는 '내일 5시에 만납시다.'라는 약속이 나로 하여금 약속 당일 5시에 다른 모든 일정을 할 수 없게 만들 뿐 아니라, 그에 따라 내일모레의 일정, 글피의 일정도 순차적으로 조정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와 5시에 만나 파스타를 먹으리라는 예감이 들면 그 전날 저녁이나 당일 점심 메뉴는 아마 간장게장 정식이나 갈비탕이 될 테지. 이렇듯 수많은 절차를 거쳐 겨우 비워둔 5시에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한번, 두 번을 넘어 반복하여 발생한다면 크게 게의치도, 분노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그와 함께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쏟았던 노력을 상대방은 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만 확실히 알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약속을 하고서는 왜 지키지 못하는 걸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그에게 또다시 소중한 시간의 일부를 내어주지 말라. 그는 그저 나와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 일들에 그의 시간을 할애했을 뿐이니 말이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모든 일에 우선순위를 메기기 마련이다. 그의 피곤한 몸뚱아리는 아마 5시에 나라는 여자와 파스타를 먹기 위해 채비를 하기엔 너무 무거웠겠지. 그에게 나는 포근한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울 만큼 중요한 인간이 아닌 것이다. 혹은, 무한도전을 너무 시청하고 싶었을 수도, 친한 친구가 축구를 하자고 전화를 했을 수도,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했을 수도, 혹은 다른 (여자) 사람-포근한 침대에서 벗어날 용기를 심어줄 만큼 매혹적인-이 파스타를 먹자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배려한 만큼, 노력한 만큼 왜 너는 하지 않니? 비참하게 분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 그는 본인의 소중한 인생을 본인이 원하는 데로 사용할 권리가 있고, 그 누구도 감히 누군가에게 소중한 시간을 원치도 않는 일에 써야 한다고 강요할 자격 따윈 없으니까. 깔끔히 받아들이자. 그에게 나는 잠보다는, 무한도전보다는, 축구보다는, 밀린 업무보다는, 다른 사람과 먹을 파스타보다는 덜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번번이 약속을 취소하면서 보고 싶다는 말로 무마하는 그 사람의 빈말은 그의 바닥을 가늠케 한다.
정말 보고 싶었다면,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약속이란 너와 나의 관계가 앞으로도 지속되리란 가정하에 맺어지는 것이고, 지금 여기서 나와의 인연이 끊길지라도 별 상관 없기에 약속을 지키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만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본인의 진심을 비겁하게 감추고, 내가 본인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시간을 할애하도록 유도한다. 본인 시간만 귀한 줄 아는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주기 시작하면 그 즉시 만만하고 우스운 심심풀이 땅콩이 된다.
약속의 말을 절대 쉽사리 뱉지 않는 사람들 곁에만 맴돌던 나는 내 옆에 있는 네가 내일이면 없어질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며 너와의 하루하루들에 목메곤 했다.
시간에 맞춰 당신에게 향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내일 만났으면 좋겠다는
당신의 전화는 나의 모든 것을 정지시켰습니다.
그러죠,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저보고 하루를 덜 살으라 하는군요.
- 이정하, 약속시간.
예상치 않게 만난 뜻밖의 인연이 소중히 지키고픈 관계로까지 순식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해버려 당사자인 나도 어안이 벙벙하다. 평생 듣고 싶었던 모든 말을 지난 한 달간 한 사람에게 다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원을 노골적으로 약속하진 않지만 진심으로 영원이 되길 바란다고, 쭉 함께 있기 위해 많이 노력하겠다는 이 사람을 나는 신뢰해도 되는 걸까?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지오바니 미라바시 트리오가 재즈풍으로 연주한 인생의 회전목마 영상을 보여준 직후,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끼손가락 단단히 걸어 나에게 연주해주겠다 다짐한 이 사람의 연주를 듣게 될 날이 과연 올까?
아직은 신뢰하면 안 되는 거겠지. 그가 나의 무엇 때문에 이렇게나 확신을 가지는지 나조차도 의아하니까. 확신을 가질 만큼 나를 신뢰하기엔, 그는 아직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를 전혀 겪어보지 못한 건 마찬가지인 주제에, 좋은 사람일 거라 믿어버린 내 생각의 근원이 직감적 확신인지 제발 그랬으면 하는 염원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다만, 꽃을 선물 받을 수 있으리란 확신은 든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금방 시들어버리는 꽃을 선물하는 것에 인색하다.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면 금방 쓰레기로 전락해버리는 꽃에 돈을 쓰는 일이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행복해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내키지 않는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일 테지. 꽃을 사주지 못하는 사람과 결혼은 말아야겠다 다짐한 까닭은 이 정도조차 타협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도 나에게 맞춰주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행복보다 본인의 경제관이 더 소중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순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꽃을 선물 해준 사람은 첫사랑이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못 받을지도 모르겠다 체념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타났다. 쭉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나는 그 말을 뱉은 그 순간의 진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년 후에도 그 진심이 유효하리라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서글프지만 유념해야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