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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양 Oct 04. 2021

느긋하게 마시는 차, 그 속의 비밀

조금 느리게, 조금 더 느리게

"차를 마셔보고는 싶은데, 제가 좀 바쁘다 보니 마시기가 어렵더라고요."


하루는 수업 중에 한 수강생 분이 말했다. 그렇다. 차는 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것보다, 커피를 타거나 내려 마시는 것보다 시간이나 여유가 좀 더 들기는 하다. 일상이 바쁘다면 카페인이 필요해 커피를 더 마시고 싶을 수도 있고, 이마저도 힘들다면 그냥 냉장고 속에 있는 아무 음료나 집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나도 하루 일정이 너무 바쁠 때에는 차 마시는 여유를 내기 힘들 때도 있다. 그래도 차 한 잔이 절실해질 때면 가장 가까이 잡히는 티백 하나를 고르고, 물을 끓인다. 머그잔에 그 티백을 넣고 끓는 물을 따른 다음에 해야 할 일에 다시 마음을 쏟는다. 하지만 난 차만이 가진 느긋함 속에 차만이 풀어낼 수 있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끼는 사람과 만날 때도, 오랜만에 친구와 밀린 수다가 필요할 때도 차는 찰떡궁합인 존재이다. 넉넉히 잡아 놓은 시간 속에서 깊은 대화를 나눌 때, 차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여유롭게 누군가와 함께 할 때도 마시기 참 좋은 것이지만, 혼자 즐기기에도 참 좋은 게 바로 차이다. 


나에게 다가온 여러 상황들이 차를 부르긴 하지만, 나는 내가 화가 나거나 나의 마음이 좀처럼 잡히지 않을 때, 그때 차가 더 간절해진다. 화가 날 때, 차가 생각난다니.... 솔직히 말하기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맘 속의 파도를 잔잔하게 다독여 줄 수 있는 건 차가 제격이다.


이전에 나는 참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나의 지인들은 내가 무슨 화가 많았냐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화가 많았던 것 같다. 겉으로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나의 맘 속에 화가 많았던 것 같다. 심지어 회사를 다닐 때, 내가 아끼던 후배 한 명은 나에게 보살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보살처럼 보였을 뿐, 내 마음속에서는 불을 뿜는 용이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은 내 동생들이나 엄마에게 번져갔다. 지금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참 미안하다. 그렇게도 풀리지 않은 불씨는 맥주를 잔뜩 마시거나 가끔은 폭식으로 풀곤 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건 그런 걸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 가족들은 내가 화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가끔 화를 내면 우리 남편은 "왜 너답지 않게 이런 걸로 화를 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 화의 불씨를 그리고 마음속의 파도를 잠재워 준 것은 바로 차였다.  


처음 차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나는 차를 바보같이 패스트푸드를 시켜 먹듯 마시고 싶었었던 것 같다. 차를 마시려고 봤더니 이래저래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많은 거다. 아니 세상에, 물은 생각보다 빨리 끓지를 않고, 차를 우리는 2~3분의 시간은 왜 이렇게 길던지. 우려낸 차는 뜨거워서 호로록 마시기도 힘들고, 심지어 다 마시고 나서 찻자리를 치우고 차도구를 닦고 정리하는 것도 귀찮았다. 다른 사람들이 우려 주던 차만 마시다가, 집에서 차를 직접 우려 마시려다 보니 시간도 많이 드는 것 같고 생각보다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했다. 차가 가진 그 본연의 향과 맛을 내기 위한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시계를 보고 또 보고, 손가락을 까딱 까딱이며 이제 막 끓기 시작한 물을, 우려 지는 찻잎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진짜 차가 주는 선물인 것을!


차를 마시고, 또 마시고, 마시다 보니 즐거워지고 또 재밌어지는 순간이 올 즈음이었다. 차 한 잔을 우리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내 마음속의 성난 파도를 잠재우는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티포트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내열유리 티포트인데, 그 속에 담긴 물들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조금씩 솟아오를 준비를 하다가, 파도처럼 일렁이게 되면, 나의 마음 속 파도는 이상하게 잔잔해졌다. 파도처럼 일렁이던 물을 잠시 잠재운 후, 찻잎과 만나는 그 순간을 보면 경이로웠다.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던 찻잎에 숨결을 불어넣은 듯 움츠러든 찻잎이 제 색을 찾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환해졌다. 그 찻잎이 전해받은 숨결을 찻잔에 따라 내가 전해 받을 때가 되면, 그 향과 맛으로 내 마음이 환해지고 성나 있던 파도는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나는 차와 조금씩 친해지게 되었다. 그 순간이 없었더라면 난 차의 매력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마음을 어지럽혔던 것들은 내 몸속으로 들어온 찻물들이 다 씻어내려 가 버렸다. 그걸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난 내 마음이 어려워지면 자동적으로 차를 먼저 찾게 되었다. 화가 날 때면 티포트에 물을 먼저 받는다. 고민이 많아질 때면, 잠시 생각을 멈추고 우선 마시고픈 차를 먼저 골라본다. 속상하고 슬퍼질 때면, 아끼는 차를 꺼내 건잎의 향을 먼저 한껏 느껴본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을 하고 또 하다 보면 그 속에 내가 빠져버려 허우적거리기 마련이다. 특히 당장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그 생각을 하고 또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차 한 잔을 마시는 게 나에게 여러모로 더 이롭지 않을까. 


차 한 잔을 준비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 속의 선물을 받아본 사람은 공감하리라 믿는다. 그래서 마음이 좋지 않을 때면 난 그 기다림이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차를 더 천천히, 좀 더 천천히 우려내곤 한다. 차를 우리는데 서두르는 마음은 차의 맛과 향을 흐뜨러낼 뿐이니까.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도 마음이 힘들다면, 우선 찻물을 올려보는 건 어떨까. 마시고픈 차를 꺼내보는 건 어떨까. 차를 준비하는 동안 그 마음은 이미 조금씩 다독여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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