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원하게 비가 내려 자동차도 깨끗해졌고, 아침햇살로 반짝하게 말려주었네요. 어제는 피로를 푸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거렸으니 오늘은 집 정리를 해야겠어요.
며칠 동안 물놀이로 거실 바닥에 모래가 자글거립니다. 매일 치워야 또다시 더러워지는 통에 잠시 청소를 중단했어요.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도 해야 하는데 그전에 소가구 배치를 우선 바꾸어야 해요. 손님치레를 하느라 잠시 소가구들의 위치도조금씩 바꾸어놨거든요.
방이 두 개뿐인 작은 아파트인데 손님의 인원수에 따라 게스트룸의 위치가 바뀌어요. 2명이면 작은 방을 내어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데 3명 이상이 되면 거실을 방으로 사용해야 하거든요. 거실에는 2인용 소파가 있어 보통은 그 앞에 이부자리를 마련하는데 이번에는 아이 둘을 동반한 손님이라 한 가족이 모두 거실에서 잠을 자야 해요. 그래서 생각해 낸 방편이 소파를 다른 곳으로 치워두는 것이었어요. 소파의 위치가 바뀌니 테이블도 덩달아 위치를 바꿉니다. 거실이 침실이 되니 아늑한 느낌도 드네요. 그냥 그대로 사용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소프트 매트리스를 거실로 옮기고 소파와 테이블은 주방 앞에 두고 식탁처럼 써볼 요량이에요.
손님이 많다 보니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빨래가 나와요. 물놀이까지 하니 더욱 그렇지요. 본래 쓰던 수건에 새 수건을 꺼내어 사용해도 늘 빠듯해요. 손님이 떠나고 간 자리에는 수북한 수건이 널려있어요. 수건을 개키는 것으로 정리를 시작해봅니다. 수북하게 쌓이는 수건을 보니 속이 후련합니다.
남편 혼자의 살림이라 건조기가 없고 제습기만 돌려서 말려요. 하지만 정말 건조기가 필요한 곳은 제주예요. 볕이 좋아도 습도가 어마어마해서 빨래에서 냄새가 나기 일쑤이거든요. 남편에게서 홀아비 냄새와 더불어 제대로 말리지 않은 빨래 냄새마저 날까 봐 항상 염려되어요. 혼자 사는 총각은 독립의 멋이 깃들어 있지만, 혼자 사는 유부남은 쉽게 처량해 보이니까요. 제주에서 제습기가 필수라는 말은 과연 정말이네요.
물놀이 용품과 래시가드를 정리해두는 일도 빼놓지 않아야죠. 오늘은 물놀이를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외출을 해도 물놀이가 아쉬운 순간이 늘 찾아오거든요. 그래서 차에 항상 물놀이 장구를 구비해두어야 해요. 아이 것은 아이용 지퍼백에 모두 모아 넣고, 남편 것과 제 것도 분리해서 넣어두어요. 튜브와 스노클링 마스크, 오리발 등도 잘 말려두었어요. 바닷물과 모래가 묻어 씻어두지 않으면 오래 사용하기 어렵거든요. 커다란 바스켓에 모두 넣어주면 준비는 끝납니다.
늘어진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빨래들도 모두 정리되니 슬슬 배가 출출해옵니다. 우리가 오기 전 남편은 냉장고 속 음식들을 모두 정리해두었다고 했어요. 이는 냉장고에 먹을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제저녁 장을 봐 둔 냉동 볶음밥을 꺼내 프라이팬에 덥힙니다. 이것은 남편의 몫이에요. 제가 청소를 하고 있는 동안 대담하게도 '그알 고유정 편'을 보느라 손하나 까딱 하지 않았거든요. 혼자 해 먹는 식사에 익숙해져 이런 레토르트 음식을 기가 막히게 잘 차려냅니다. 특히, 오므라이스용 계란을 전문가처럼 부쳐내지요. 점심을 먹고 나면 아이가 노래를 부르던 오레오 빙수를 먹으러 갑니다.
제주에 오면 오레오 빙수를 먹는 것이 우리 가족의 의례예요. 여름이나 겨울이나 어김없이 찾지요. 우유맛이 기가 막히게 좋은 데다 오레오 가루를 듬뿍 뿌려주는 것이 달콤 쌉싸름하니 아주 조화로워요. 바닷가에 면해있다면 손님이 바글거릴 맛인데 안쪽에 위치해있다 보니 늘 한산해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자리가 꽉 들어찼네요. 단골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어요.
열심히 빙수를 떠먹고 있는데 남편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옵니다. 남편회사의 절친 형님이에요. 투병 중인 분이라 전화만으로도 마음이 덜컥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문 밖으로 나갑니다. 달콤하던 빙수가 깔깔하게 느껴집니다. 한참 후 더위를 이기지 못했는지 남편이 안으로 들어오는데 선글라스 안으로 눈물이 주르륵 흐르네요. 결혼해서 남편이 우는 모습을 딱 두 번 보았고, 오늘이 세 번째입니다.
남편과 연애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어요. 결혼 준비를 하면서 결혼을 하네 마네 감정이 상한다는데 그 과정에서도 우리는 잘 지냈거든요. 그런데 신혼여행 가서 사소한 것으로 마음이 상해 헤어질 것처럼 떠들고 엉엉 울었죠. 그리고 또 한 번은 아버님의 무례함으로 속이 상해 있던 적이 있는데, 남편이 자기 아버지 생각만 하는 행동을 하기에 배신감에 미친 여자처럼 화를 냈을 때 남편도 지지 않고 떠들다가 눈물 콧물 다 뺐던 때가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오늘. 남편이 내 눈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네요.
전화를 끊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디로 갈까를 묻는데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지금은 자신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우리 가족의 일정대로 움직이자고 하네요. 무작정 드라이브를 시작합니다.
바닷길을 따라 달리는데, 삼총사 중의 한 명에게 전화가 왔네요. 운전대를 교대해주고 다시 드라이빙을 시작하는데, 그쪽에서도 울음바다인 모양이에요. 말없이 달리다가 한적한 곳에 주차를 합니다. 바다를 내다보다가 차에서 내려요. 남편도 덩달아 내려서는 말없이 곁에 섭니다.
"커피... 마실까?"
쓰린 속을 달래기에는 술이 제격이지만, 아이가 있고 드라이브 중이니 그러기가 어려우니까요. 차가운 커피라도 들어가야 마음이 달래질 것 같아서 던진 말에 남편도 같은 생각인지 바로 동의를 합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들어섭니다. 그 사이 아이는 잠이 들었고요. 의자를 두 개 붙이고 거기에 뉘이니 콜콜 잘 자네요.
고소한 맛과 새콤한 맛의 아메리카노를 각각 주문해요. 그리고 말없이 바다를 내다보아요. 풍경 값까지 더해진 커피값은 꽤 비싼 편이었지만, 리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가성비 갑인 카페가 되네요. 거기에 인생 샷까지 찍을 수 있는 하늘 옥상도 있거든요. 좋은 풍경은 슬픔을 잊게 합니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아이가 자는 동안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어요. 그 지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풍경에 관하여도, 우리의 이런 삶에 관하여도 이야기를 해요. 남편의 장점은 슬픔을 오래 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슬픔에 잠겨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맴도는 저와는 참 다른 사람이에요. 남편의 지인도 남편의 이런 점 때문에 힘들 때마다 남편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정작 남편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남편의 덤덤함이 이야기 상대를 안심시킨다는 것을 남편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잘 자던 아이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네요. 기분 좋게 잤는지 빼꼼 뜬 눈 속에 미소가 묻어나요. 아이에게 산책을 권유해보아요. 흔쾌히 따라나서서는 제 엄마보다 앞장을 서네요. 아이 덕에 근사한 하늘 옥상을 알게 된 것이랍니다.
이윽고 출출하다는 아이. 바다를 조금 더 보고 싶기에 디저트를 주문하고 컬러링북을 펼쳐 아이에게 건넵니다. 다시 평화가 찾아옵니다.
더위가 한풀 꺾인 것 같아 근처 무지개학교를 찾기로 해요. 아이를 임신했을 때 지나다 우연히 알게 된 학교인데 아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알록달록한 건물들을 보고 제가 느꼈던 감정을 아이도 느끼게 될까요?
어? 그런데 제가 알던 무지개학교는 온데간데없고 현대식으로 깨끗하게 지어진 학교만 있네요. 그 사이 학교 전체를 재건축한 모양이에요. 아쉬움이 남지만초등학교에는 놀이터가 있잖아요. 잠깐만 놀다가기로 합니다. 하지만 잠깐만, 은 가능할 리가 없지요. 놀이터를 전세내고 놀아봅니다. 구름사다리, 정글짐, 사다리 넘기 모두 좋아했던 기구인데 지금은 오히려 무섭네요. 맨꼭대기에서 손을 놓고 편안히 앉아 하늘을 이고 있던 기억은 꿈만 같아요. 하지만, 저를 대신하여 저의 2세가 자유롭게 놉니다. 묘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드높고요.
한라산이 코앞에 있는 듯 가까워 보여요. 가시거리가 이렇게 좋은 날이 드문데 오늘은 참으로 운이 좋지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연신 촬영 버튼을 눌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