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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글디오: <글로 보는 라디오> #10

by teaterrace



뒹굴거리기 좋은 날이에요.


아침을 먹고 피노키오에게 음을 부탁합니다. 피노키오는 저희 집 AI스피커 이름이에요. 곁의 조명도 켜요. 음, 분위기 좋은데요.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어 봅니다. 아, 시원하고 좋아요.


단출한 남편의 집 거실, 조명 하나로 아늑해진다.


"엄마는 예술적인 노래를 좋아하는구나?"


아이가 말을 걸어와요. 시끄럽지 않은 음악을 뜻하는 듯해요. 지금은 아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결혼 전에는 이런 여유가 일상이었어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고 퇴근 후 돌아오면 고요 그 자체였죠. TV를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집에 오자마자 TV를 틀었어요. 사람 말소리를 들어야 혼자 있는 기분이 덜하니까요. 라디오나 음악만 틀어두면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은 잠들 때까지 입을 쉬지 않는 아이 덕에 귀가 쉴 틈이 없지만요.


하지만, 당시에는 여유라고 하지 않고 외로움이라 불렀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적당히 외로워야 여유도 느끼는데 말이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외로울 여유가 없어요. 출근할 때는 출근하느라 방학해서는 아이와 함께 하느라요. 그때는 퇴근 후 시간이 온전히 제 것이다 보니 적절히 안배할 줄 몰랐던 것 같아요.



혼자 먹더라도 초라하지 않기 위해 한상 가득 반찬을 냈고요.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굶었어요. 식사를 마치면 때로 요가를 하기도 했고 책을 읽기도 했어요. 우와, 나열만으로 부러운 일상이 저의 것이었네요.


일주일에 한 번은 마사지를 받고 노곤해진 몸으로 집에 돌아와 식사고 뭣이고 다 치우고 잠을 잤어요. 하얀 매트리스 위에 속옷 하나 걸치지 않고 누워요. 타월 촉감의 홑이불만 덮고요. 그 기분이 마치 구름 위 같았던 기억이 나네요. 잠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핸드폰도 무음으로 해두고 그저 이불의 '사그락'한 촉감만 느끼며 누워있었죠. 호텔 침대에서 잘 때처럼 쾌적하고 산뜻한 기분을 느끼고파서 모든 침구를 새하얀 색으로 바꿔놓았고요.


참! 그때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콜라겐도 한 병씩 마셨어요. 그러고 나면 다음 날 얼굴이 반들반들 윤이 났거든요.


외로운 날이 반복되면 동료들을 초대해서 식사 대접을 하기도 했죠. 주로 양식 요리였는데 한식에 비해 손은 덜 가면서 꽤 근사한 효과를 낼 수 있었거든요. 가끔씩 베이킹을 해서 나눠주기도 했네요. 레몬 마들렌, 당근케이크, 쿠키, 머핀 같은 것들요. 그렇다 보니 동료들은 제가 음식 좀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결혼해서 지금까지 할 줄 아는 반찬이 몇 개 안된다는 사실을 도통 믿지 않아요.


가끔씩 꽃이나 화분도 샀어요. 창에 올려두고 퇴근 후 바라보는 기분이 꽤 좋았거든요. 물론 대부분은 말려 죽였지만요. 가든 박스에 넣어두는 것만으로 카페 화분 같은 효과를 낸다며 혼자서 만족했던 기억도 나요.


예쁘게 만들어 예쁘게 담고 예쁘게 찍어 싸이에 올리던 일상들. 지금은 sns를 거의 하지 않지만 그때의 저는 솔로의 삶도 이렇게 즐겁고 근사할 수 있다고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치기 넘치던 어린 날의 제가 새록새록 올라요.


싸이월드에 올린 사진들: 말려죽인 라넌큘러스, 홈메이드샌드위치와 유기농딸기스무디, 그리고 책

그런데 말이죠. 기억을 더듬을수록 그때의 지독한 외로움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시작은 분명 여유로움을 그리워하는 거였는데요. 가만 생각해보면 저는 외로움이 참 많은 사람인가 봐요. 외로움이 싫어 꾸준히 무언가를 만들었고, 잊으려 잠을 잤고, 나 괜찮음을 굳이 보여주기 위해 에너지 넘치는 척하고 살았나 봐요.


그때는 제발 바빠서 외로움조차 느낄 수 없는 삶을 살았으면 했어요. 차라리 결혼이라도 해서 남들처럼 복닥거리고 살기를 열망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때의 여유로움이 사치처럼 여겨지지만요.


인간은 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그리워하며 사나 봐요.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말이죠.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리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 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젊은 날엔 젊음을 잊었고 사랑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였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맞아요. 젊었을 땐 내가 젊은지 몰랐고요. 사랑할 땐 나만 봤어요. 사랑 인 줄도 몰랐고요. 아주 흔한 건 줄 알았죠. 지금 생각해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는데 말이에요.


인간은 늘 과거를 회상하며 네요. 뿐만 아니라 현재의 내가 가진 것이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이기까지 하고요.


20대의 저도 그랬어요. 갓 스물을 넘겨서는 어리고 어린, 적어도 그때는 삶의 걱정이란 것은 없을 것 같던 10대를 회상하며 다시 한번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었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이십 대 중반에는 푸릇푸릇한 20대 초반의 내가 그리웠어요. 내 꿈이 손에 쥐어진 이십 대 후반, 그리고 삼십 대에 들어서고 나서야 스물일곱의 내가 너무 예뻤던 나이였다는 것을 알고 매우 좌절했던 기억이 나요.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왜 그때는 젊음이 좋은 줄 모르고 과거만 보고 살았던 것일까요. 쩌면 시간이 흘러 지금의 저를 또다시 그리워할지도 몰라요.


맞아요. 지금 우리는 충분히 젊고, 그러므로 온몸을 부둥켜안고 미치도록 사랑을 해도 괜찮은걸요. 더 늦기 전에,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금의 나를, 지금의 내가 가진 것들을 더 사랑해야겠어요.



날도 덥고 나가기 싫어요.


하지만 계속 집에만 있으려니 저희 집 꼬마가 심심하대요. 뭐라도 해야 할 듯해요.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다 남은 우도 땅콩 막걸리가 보여요.


"막걸리빵 만들자!"


'술알못'인 제가 마셔도 맛이 좋아요. 혹시 '바밤바'라고 아세요? 밤맛 아이스크림인데 이 막걸리가 딱 그 맛이에요.



밀가루를 체치고 미리 꺼내 뒀던 우유와 계란까지 섞어 섞어 잘 반죽해요.



랩을 씌워서 부풀 때까지 따뜻한 곳에 두래요. 베란다가 좋겠어요. 자연 발효가 가능하리만큼 덥잖아요 요즘.


이제 부풀 때까지 뭐하죠. 먹어야죠. 심심하면. 냉동실을 뒤져서 얼린 피자를 꺼내요.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니 맛있네요. 아이도 잘 먹어요.


아이는 틈틈이 반죽이 부풀었는지를 확인해요.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했으니 밥통에 부어볼까요? 찜기는 어쩐지 자신이 없어요. 짜잔! 꽤 그럴싸한 막걸리빵이 나왔어요. 밥통에 하니 포슬포슬한 느낌보다는 쫀득한 식감에 가까워요.



저녁식사 전에 한 조각씩 먹어봅니다. 달큼하니 꽤 괜찮은데요?



아마 아주아주 나중에 아이와 함께 이 막걸리빵을 만든 이 기억도 제가 분명 그리워할 거예요. 그러니 오늘 충분히 만족하며 잘래요.


오늘의 저도 꽤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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