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별이 달캉, 바다가 총총
열차의 얼굴이 은하철도 999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길고 긴 선로 위를 달리는 열차, 어디론가 향하지만 여전히 미지인 그 느낌이 꼭 지금 두 사람의 여행 같았다.
바다를 옆으로 끼고 달리는 호쿠토 선은 히가시무로란, 다테몬베쓰, 도야, 오샤만베, 야쿠모, 모리, 오누마 코엔, 신 하코다테 호쿠토, 고료가쿠를 거쳐 하코다테에 그들을 내려놓았다. 하코다테는 삿포로에서도 4시간 가까이 걸리는 홋카이도의 남쪽 끝자락이라 많은 사람들이 하코다테를 궁금해하면서도 고민하곤 했다. 그런데 노보리베츠에서 출발하니 오히려 가깝기도 하니 지원은 어쩐지 노보리베츠 덕을 본 기분이었다.
저녁 7시 반의 하코다테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ようこそ、函館へ’라는 표지판과 잉카 문명에서 봤을 법한 벽화가 그들을 반겼다. 역사 밖은 눈보라인지 비바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역사를 나서는데 중국인 부인이 제 아이를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크게 혼을 내는 통에 두 사람이 혼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숙소는 역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바람이 워낙 거세서 5분 거리가 멀게만 느껴질 즈음 커피 자루처럼 거친 질감의 갈색 천이, 비계 위에서 바람에 쉴 새 없이 펄럭이는 호텔이 보였다. 그 비계 위에 덮인 천이 바람을 탈 때마다, 건물 전체가 웅크린 동물처럼 움찔거리는 것만 같았다. 낭만의 하코다테에서 공사 중인 호텔이라니 실망이 앞섰지만, 추위 때문에 서둘러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수속을 위한 프론트와 그 옆으로 어메니티와 잠옷을 구비한 테이블이 있었고, 식당으로 보이는 공간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체크인을 한 후 두 사람은 호텔 옆 편의점에서 하코다테 우유와 컵라면 삼각김밥을 사서 들어왔다. 룸으로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화, 수, 목 저녁에는 카레를 제공한다는 문구를 봤다. 내일 저녁에는 이곳에서 주는 카레를 먹자고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
역시 바람이 거셌다. 커튼을 걷어 창밖을 보니 어젯밤에 본 금속 파이프가 시야를 가렸고 바람을 그네 삼아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기다란 천이 눈앞에 대롱거렸다. 가까운 것 말고는 좋은 게 없잖아. 그렇지만 하코다테는 그들의 실망을 위로하듯 푸른 날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어제 본 굿타라 호수만큼이나 파란 하늘 덕에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졌다.
역 안의 방문자 센터로 가서 시덴 1일 승차권을 샀다. 시영덴샤를 하루 동안 무제한으로 탑승할 수 있는 티켓인데 마치 복권처럼 그날의 날짜를 동전으로 긁어 표시해서 기사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 가까이에서 시덴을 타고 주지가이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하코다테의 상징 아카렌카 창고군 거리가 있다.
홋카이도에 온 이래로 덴샤는 처음 타 보는 거라 지원과 한별은 이를 기다리면서 긴장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우리나라에서도 종로의 옛 시가지에 존재하던 전차를 탄다고 생각하니 마구마구 설레기도 했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덴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눈이 내린다. 어쩜 이렇게도 기가 막힐까. 하코다테는 눈이 다 녹아서 거리가 겨울의 느낌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반가운 눈이 기가 막힌 순간에 내리다니. 그 눈을 배경으로 녹색 덴샤가 지나갔다. 후에 이 사진은 한참동안 지원의 프로필 사진이 되었다.
창고군 거리는 바다에 면해 있어 바람이 더욱 거셌지만, 자체로 낭만이었다. 빨간 벽돌을 쌓아 올린 창고는 일전의 료운가쿠처럼 아래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몸체에 삼각형 지붕을 올린 형태였다. 삼각형 부분의 한 가운데에 ‘나무빽빽할 삼(森)’이라는 흰 글자가 크게 새겨있었다. 그런 건물이 CTRL+C, CTRL+V 하듯 나란히 줄지어 창고‘군(群)’이라는 말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창고 안에는 홋카이도와 하코다테를 상징하는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을 팔기도 했고, 딸기 샌드 같은 먹거리를 팔기도 했다. 그 중 유리 공예품 코너에서 한참 구경을 했다. 주로 장식품인지라 사지는 않았지만, 그 작은 유리 안에 아주 세심한 디테일이 들어 일본의 대단한 장인 정신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창고 무리의 맞은 편에는 ‘럭키 삐에로’라는 이름의 음식점과 스타벅스 등 식음료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진초록색의 표지판들과 이정표들이 벽돌 색깔과 아주 잘 어울리는 거리였다. 왼편은 삐에로의 유쾌한 혼돈, 오른편은 세련된 스타벅스의 질서. 하코다테는 이토록 양면적인 도시였다. 한쪽은 레트로 감성의 극치, 다른 한쪽은 세련된 일상의 쉼표. 두 공간은 같은 거리에, 나란히 자리해 있었다. 마치 바다를 가르는 하코다테 반도의 지형처럼.
“하코다테에 왔으면 럭키 삐에로는 꼭 가야지.”
하코다테에서만 먹을 수 있는 햄버거 가게라고 들었다. 바다에 면해 있는 레스토랑이니만큼 그에 걸맞는 분위기와 낭만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인. 익숙한 프랜차이즈의 무채색 매장들과는 전혀 다른, 기묘하고 어수선한 내부. 서커스와 레트로를 섞은 혼돈의 미학(?)이 전체적인 콘셉트 같아 보였다. 인형, 종교미술, 요상한 그림들(!)이 잔뜩 있어 마치 ‘햄버거를 파는 테마파크’ 느낌에 계속 웃음이 났다. ‘햄버거를 먹으러 온 건지, 작은 서커스단을 구경하러 온 건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달큰한 간장 냄새가 풍기자, 한별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대표메뉴인 차이나 치킨버거였다. ‘달달한 간장소스 닭튀김이 가득, 커다란 사이즈에 지역민들도 단골’이라는 문구처럼 푸짐한 단짠 버거를 한 입 베어 물더니 한별이 말했다.
“엄마, 치킨버거에 마법을 걸었는데?”
정말로, 이상한 맛집이었다. 묘하게, 계속 생각나는.
햄버거 가게를 나와 그 옆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모토마치 언덕을 걸으려면 아직 더 어두워야 했다. 어두운 갈색 나무 외형에 검은 지붕을 얹은 건물로 창고군 거리와 조화를 고려한 것처럼 보였다. 홋카이도 시그니처 멤버십카드를 하나 샀다. 어쩐지 엽서처럼 홋카이도 방문을 인증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원은 밀크티와 커피를 주문해서 창고들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음료를 마시니 한별이 슬슬 잠이 온다고 하더니 어느새 의자에 기대 잠이 들어 있다. 그래서 지원은 한별이 잠을 자는 동안 책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눈앞의 풍경이 너무 멋져서 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그친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빨간 벽돌을 배경으로 하얀 눈송이가 쉼 없이 쏟아졌다. 크고 작은 눈송이는 아래로 내려오다 다시 상승을 하기도 했다. 바람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도록 천천히 보여주는 몸짓 같았다. 눈송이들만이 움직이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조차 발걸음을 멈춘 듯했다. 그리고, 지금만큼은 이 시간 안에 갇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코다테의 낭만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만 같았다. 화창한 봄날씨에 설렌다고 생각했는데 지원은 확실히 눈에 설레는 사람이었다.
봐도 봐도 지겹지 않은 눈송이 군무에 빠져있을 때 한별이 슬며시 눈을 떴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한별도 놀라는 눈치였다.
낭만을 아는 아이였다.
빨간 벽돌, 노란 불빛, 눈송이가 삼합일체를 이루는 순간, 밤이 찾아왔다.
모토마치 거리로 향해야 하는 순간이다.
아래쪽은 눈이 쌓이지 않은 맨바닥 뿐이었는데 언덕을 올라서자 채 녹지 않은 눈이 곳곳에 깔려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길이 조금 미끄러웠지만, 두 사람은 조심을 더해 올랐다. 오르다 한 번씩 뒤돌아본 풍경은 환상 그 자체였다.
색색의 옷을 입고 있는 나무들, 갖은 빛깔의 가로등, 눈비로 젖어 거울처럼 빛나는 바닥이 반사하는 형형색색의 빛들. 눈에 젖은 핸드폰 렌즈가 멋진 장면을 남겨주었다. 마치 특별렌즈를 장착한 듯 원형의 물방울들을 곳곳에 담아 겨울 언덕의 풍경을 더 근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동그란 자국들은 어느 곳에서는 초록의 빛이었고, 또 어느 곳에서는 노란 빛이었다. 그 알록달록한 자국이 그 밤을 빛내주고 있었다.
덴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그냥 그대로 집으로 걸었다. 덴샤를 타나 걸어가나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는 계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 내리는 거리를 지나는 덴샤와 노란 가로등과 그 빛이 비추는 곳마다 선명하게 뿌리는 눈 조각들이 그렇게 그들을 걷게 만들었다. 숙소 옆 입간판에 하얀 눈이 덕지덕지 붙어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눈을 할로겐 등이 하얗게 비춰 그마저도 낭만이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카레를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때를 맞춰 온 다른 손님들 속에 그들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엄마. 여기 사 먹는 카레보다 더 맛있어.”
맛에 ‘깊이가 있다’는 표현을 곱씹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윽한 카레 맛이 너무도 따뜻해서 지원은 잠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원의 엄마는 노란 한국식 카레만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엄마 맛’같은 카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지만 그냥 그런 맛이었다.
“엄마. 이 호텔, 난 정말 마음에 드는데?”
지원의 마음을 읽은 듯 한별이 그렇게 말했다. 천 쪼가리 나부끼면 어떠랴. 소울의 맛이 느껴지는 이 카레 한 그릇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식물원이 있는 온천마을에 가기로 했다. 식물원에는 온천 하는 원숭이가 살고 있다고 들었다. “슛파츠 시마~스”라고 외치는 버스 기사의 느린 말투가 몇 번 반복된 후에 두 사람은 유노카와 온센 정류장에 내렸다. 식물원으로 가는 동안 ‘마츠쿠라’라는 하천을 지났고, 하천의 끝은 바다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하천에서 오리 떼가 노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일반 버스를 탔으면 더 가까이 더 빨리 도착했을지도 모를 그곳을 향해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끊임없이 즐거웠다.
매표소에서는 원숭이 먹이도 함께 팔았다. 식물원 입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에 원숭이 온천이 있었다. 원숭이들은 관람객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익숙한 듯 온천의 가외 쪽에 몰려있었다. 몸통은 온천수에 담그고 두 팔은 테두리에 걸친 채로 한가롭게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한별이 먹이를 힘껏 던져주자, 얼른 그 위치로 이동해 먹이를 주워 먹고는 다시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물 위로 떨어진 먹이를 향해 유유히 헤엄쳐 먹기도 했다.
계속 지켜본 바로 먹이를 먹는 것은 주로 서열이 높은 원숭이들이었다. 낮은 서열의 원숭이가 먹으려고 하자 무리의 왕으로 보이는 원숭이가 위협을 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그 후로 그 원숭이는 그 온천탕이 아닌 다른 곳으로 숨어서 잘못 떨어지는 먹이를 주워먹는 신세가 되었다. 한별은 그 모습이 안쓰럽다며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 먹이를 던져 주었다. 그러자, 탕 안에 있던 다른 원숭이들이 갑자기 박수를 치며 먹이를 자기쪽으로 던지라며 유도했다. 똑똑하구나. 그들의 행동이 사람과 너무 닮아 두 사람은 엄청 놀랐다. 감탄을 하며 한별은 그쪽에도 먹이를 던졌다. 그런데 실수로 한 원숭이의 머리에 뿅-하고 떨어졌다. 그러자 그 원숭이가 놀라며 두리번 거렸는데 그 모습이 미안하면서도 너무 웃겨서 두 사람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봉지에서 먹이가 떨어지자, 식물원 안으로 이동했다. 그 안에는 역대 원숭이 왕의 계보가 적혀 있었고, 차기 보스 후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삼대까지는 한 마리가 보스를 하다가 전국시대에는 장녀와 차남, 삼남 원숭이가 패권 다투던 역사까지 읽고 나니 바깥의 원숭이들이 대단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밖에도 각종 식물들과 잉어, 자라, 사슴벌레까지 구경한 후 식물원을 나왔다.
유노카와 온천 마을에는 당연하게도 온천이 가능한 숙소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온천에서 쓰가루 해협을 바라보며 온천을 할 수 있다기에 두 사람은 근사해 보이는 몇 개 호텔로 들어가서 당일 온천이 가능한지 물었으나, 당일 온천을 운영하지 않거나 이미 인원이 차서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온천이 가능한 다른 호텔을 안내받아 거기로 들어갔다. 수건을 대여하고 탕 입구에서 지원은 한별과 헤어졌다. 30분만 즐기고 나오기로 약속을 했다.
온천장은 다소 시설이 낡아 보였지만, 낮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지원이 가볍게 샤워를 할 때 모두 퇴장했다. 단독으로 온천을 전세 낸 지원은 실내 탕의 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
전면이 유리로 되어 수평선 끝까지 바라다보이는 바다가 바로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헉-. 숨이 막혔다.
이 근사한 풍경을 혼자 즐기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각기 다른 온도의 탕에 지원은 차례대로 몸을 담갔다. 부글부글 올라오는 스파가 시원하게 지원의 몸을 마사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천 온천에 들어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따끈하게 데워진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바다 가까운 쪽으로 몸을 옮기자, 그 앞에 해변이 해를 받아 하얗게 빛났다. 혹시라도 그 앞에 행인이 지나면 어떡할지 잠깐 고민이 되었으나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마주한 바다 곁 절벽이 너무 근사해 지원은 그 고민마저 잊었다.
하코다테 산 남동쪽으로 돌출한 곳에 있는 다치마치곶은, 험준한 해안 풍경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절벽이었다. 그곳에 서서 쓰가루 해협을 마주하는 상상을 했다. 황홀하다는 말도, 벅차다는 말도, 이 풍경 앞에서는 모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마음만 가득 차오르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고요해진 마음에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 풍경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 경관의 압도감 앞에서 사람은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사실마저 오히려 더 깊은 황홀로 다가왔다. 그저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일밖엔 할 수 없었다. 지원은 탕의 사이드에 두 팔을 얹고, 고개를 괴고,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밖에 나오니 한별이 아직이었다. 온천을 즐기면서도 혹시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봐 조급한 마음이 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조금 후에 나온 한별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별아, 괜찮았어? 엄마는 너무 황홀했어.”
온천 때문인지 풍경 때문인지 한껏 차분해진 한별은 조용하게 지원에게 답했다.
“엄마, 여기 아빠랑 꼭 다시 오고 싶어. 너무 근사해서 나만 보기가 너무 미안할 정도야.”
과연 같은 감정을 공유했구나.
우리는 가족이 맞구나.
지원은 이렇게 생각하며 한별을 바라보고 지긋이 웃었다.
“그러자. 꼭 다시, 아빠랑 오자.”
그 후로 두 사람은 그곳을 ‘바다 온천’이라 불렀다.
온천 후 맞는 눈은 정말로 상쾌했다. 덴샤에서 내려 눈보라가 그들의 몸을 뒤로 미는 순간에도 춥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온천의 여운은 오래도록 그들을 감쌌다.
“조금만 더 걸으면 고료가쿠야.”
“아, 어제 엄마가 말했던 별 모양 요새?”
“응, 맞아. 옛날에 진짜 전쟁도 있었던 곳이래. 근데 지금은 평화로운 공원이지만.”
타워에 올라 내려다본 그곳은 정말 별 모양 성과 같았다. 야속하게도 도착하자마자 눈이 그쳤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명확하게 별 모양이 보였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별 모양으로 만든 요새래.”
봄이면 이곳은 분홍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명소라고 했다. 분홍색 별을 상상하니, 지금의 ‘눈별’ 풍경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별은 망원경으로 고료가쿠 안을 들여다보며 산책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또 미니어처 앞에 서서 괴물 흉내를 내며 웃고, 아래가 훤히 보이는 유리 바닥 위에서는 발을 떼지 못하고 쭈그려 앉았다. 그런 한별을 지원은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한별의 표정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고, 웃는 입매조차 떨리는 듯했다.
눈이 그치고, 천천히 눈구름도 걷혔다. 그 사이로 햇빛이 타워 안까지 길게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벚꽃 우유 아이스크림을 들고 창밖을 향해 내밀었다. 하얀 배경 속에 들려 있는 두 손의 아이스크림— 그것만으로도 오늘이 ‘기억될 하루’라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해가 점점 고료가쿠에 가까워지더니 별 모양 테두리에 하나둘 불을 밝혔다. 마치 태양과 조명이 공수교대를 하듯 어느새 어둠 속에서 빛나는 고료가쿠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시내 곳곳에 불이 들어와 완전한 밤이 왔을 무렵 두 사람은 하행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은 마치 우주공간처럼 묘한 푸른 빛으로 변하더니 벽에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밝을 때는 보이지 않던 벽의 무늬가 푸른 빛 안에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마침 밤하늘의 별과 같았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어둠이 찾아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별처럼 신비로운 공간의 마법.
다시 덴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한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식당이 있었다. ‘원조 하코다테 징기스칸 - 양의 집’. 고민 없이 두 사람은 덴샤에서 내려 그곳으로 향했다. 원래는 예약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인 듯 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이 그곳에 갔을 때는 사람이 많이 없어 바로 2층의 창가석으로 안내받았다. 단품 대신 밥과 미소 장국이 포함된 무제한 메뉴를 선택했다.
가스버너 위에 놓인 석쇠 테두리에 배추, 숙주, 양파, 당근, 피망 등이 깔리고 한별은 익숙한 듯 고기를 집어 석쉬에 구웠다. 치익- 소리와 함께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만족한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배가 차고 나니 건물의 외형도 눈에 들어왔다. 마치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빨강과 녹색으로 치장된 건물이었다.
이틀 동안 걸은 거리가 무려 평균 만 오천 보를 훌쩍 넘었다.
한별은 하코다테가 조금 덜 재밌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밖에 나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원은 하코다테 전망대 이야기를 쓱 흘렸다.
“일본 3대 야경 중에 하나가 하코다테 야경이라는데?”
한별이 지원을 쓱 올려다보았다.
“그럼 밤에 나가면 되겠네.”
“그렇긴 한데, 낮에 보는 건 또 어떨까? 왜냐면 강풍 불면 운행을 안 할 수도 있거든. 지금은 마침 운행 중이고.”
한별이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코다테 산에서 내려다보면 꼬리처럼 뻗은 반도가 바다 가운데를 가르고 있는데, 양쪽 바다와 어우러지면서 마치 물고기 꼬리 같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지형이 부드럽게 휘어져서 하트 윗부분 곡선으로 보이기도 한다네.”
한별은 정확히 물고기 꼬리, 부분에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잠깐만 보고 올까?”
예스! 통했다. 지원은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선 역으로 가서 하코다테에서 유명하다는 시오라멘을 먹고 전망대로 향했다. 비록 야경은 아니었지만 모래시계 같은 독특한 지형의 반도가 충분히 멋스러웠다.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에 등장하는 항구마을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디선가 키키가 아주 능숙하게 빗자루를 타고 그곳을 향해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키키가 탄 빗자루가 뒤집어지며 사나운 바람이 불었다. 키키가 놀라는 표정을 하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안내방송이 나왔다. 강풍으로 인해 로프웨이 운행을 중단할 예정이라는 안내였다. 두 사람은 그래도 하코다테 시내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했다.
전망대를 내려와 모토마치 성당, 하리스토스 정교회를 둘러보았다. 아쉽게도 내부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이국적인 건물과 정돈된 주변 풍경이 멋져서 자체로 위로를 받았다. 회색빛 외벽에 노란 창틀이 조화를 이루는, 100년도 넘은 목조 건물로 향했다.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서양풍 공공건물이라는 하코다테 공회당이었다. 다행히도 이곳은 내부 관람이 가능했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선 공간엔 창문마다 노란 창틀이 달려 있었고, 바깥의 눈 쌓인 마당과도 묘하게 잘 어우러졌다. 무엇보다 이 공간을 특별하게 만든 건— 그 자체로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고풍스러운 목조 테이블과 의자, 사무를 봤을 법한 널찍한 책상과 초록 갓등을 씌운 램프, 검은 중절모와 낡은 책,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 무도회가 열렸을 듯한 커다란 홀, 그리고 바다와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노란 발코니까지. 두 사람은 마치 다른 세기로 이동해 있는 착각을 받았다.
무도회장이라 여겼던 그 공간은, 알고 보니 과거 귀빈들이 연주를 감상하던 음악회장이었다. 고풍스러운 커튼과 잘 어울리는 붉은 벨벳 의자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건물 곳곳에 깃든 낡은 결, 삐걱이며 속삭이는 나무 바닥, 창문 틈 사이로 흘러드는 겨울 햇살까지— 모든 것이 마치,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해주는 듯했다.
공회당을 나와 구(舊)영국 영사관으로 갔다. 그곳의 홍차와 스콘이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글을 봤었다. 영사관 같은 공공건물은 관공서처럼 네모진 모양의 포멀한 건물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대문이 있는 저택 같은 인상이었다. 두 사람은 크림 티 세트와 치즈 케이크 티 세트를 주문했다. 창가가 내다보이는 자리에 놓인 원형의 라탄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클로티드 크림과 잼이 곁들여진 스콘 두 개와 원하는 찻잎을 골라 즐기는 홍차 세트가 먼저 나왔다. 그 뒤로 갸토 프로마쥬, 라는 구운 치즈케이크와 홍차로 곧이어 테이블에 올려졌다. 차가 우러날 때까지 티-포트를 덮어두어야 한다는 안내를 하고 직원이 돌아갔다. 티-코지가 덮인 모습이 마치 티-포트가 따뜻한 패딩을 든든하게 입고 있는 것 같아 그 모습이 참으로 정겨웠다. 차가 우러나는 동안 테이블 위에 놓인 매뉴얼을 읽었다. 매뉴얼은 아래와 같이 써 있었다.
[훌륭한 홍차를 맛보는 방법]
1. 향을 음미한다 2. 색과 맛을 음미한다 3. 마지막 한 방울까지 즐긴다.
[홍차를 즐기는 방법]
1. 우린 홍차를 컵의 80~90%까지 따른다. (찻잔에 가득 부어 2잔 분량이 1인분)
2. 두 잔 이후 홍차가 떫은 느낌이 들 때 우유를 넣어 잉글리시 밀크티로 즐긴다.
(컵의 1/4~1/5 만큼의 우유에 컵의 90%가 차도록 홍차를 부어 마신다.)
정통 영국식 홍차를 즐기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한별과 지원은 그대로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덮개를 벗겨낸 후 조심스럽게 티-포트를 들어 가볍게 몇 바퀴 돌린 후 차 거름망에 부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지켜보는 지원도 긴장이 되었다. 묘한 주황빛 액체가 조로록 컵 안으로 쏟아졌다. 자신이 따른 홍차를 맛 보려는 한별의 표정에 기대가 차올랐다. 한별은 입술에 홍차가 살짝 닿자 뜨거워 깜짝 놀랐다. 후- 하고 길게 입 바람을 불어 식힌 후 다시 시도를 했다. 한 모금 머금고 한별은 두 눈을 꼭 감고 음미했다.
“엄마-, 지금 나 엄청 호강하는 기분이야.”
꼭 감은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원도 그런 한별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영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엄마도 어쩐지 영국 황실에 와 있는 기분이야.”
그렇게 두 사람은 스콘을 케이크를 홍차를 즐겼다.
티 타임을 마치고 내부를 관람했다. 오래된 장식장과 다기, 그리고 응접실과 개화기 하코다테의 사진들을 찬찬히 감상한 후 마지막으로 여왕이 걸쳤을 법한 빨간 벨벳 망토를 걸치고 왕관을 쓴 채로 빨간 왕좌에 앉았다. 부끄러운 듯, 때로는 고고한 표정을 하던 한별이 제 엄마에게 입고 의자에 앉아보라고 했다. 엄마가 자신과 똑같이 망토와 왕관을 걸치고 의자에 앉자, 그 앞에 서서는 한쪽 팔을 배 앞으로 접고 한쪽 무릎을 굽히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왕 폐하~”
그 모습이 어찌나 신실한지 지원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밖에 나오니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불이 켜진 노란 공회당 위로 파스텔 빛 하늘이 너무도 그림 같다. 돌아오는 길이 항구 근처라 창고 거리 쪽으로 걸었다. 물 위에 떠 있는 가네모리 신사에 불이 켜져 있다. 두 사람은 두 손을 모아 앞으로의 안녕을 기도했다.
“엄마, 나 이제 하코다테가 정말 마음에 들어.”
아침에 자신이 했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지루할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 멋졌어.”
“별이가 좋다니까 엄마도 하코다테가 더 멋져보여.”
달캉거리는 덴샤의 소리가 창밖에서 흘러들어왔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낭만이면 좋겠다. 그 소리는 어쩐지 지원의 마음을 톡 하고 건드렸다.
한별의 말처럼, 지루할 줄만 알았던 하루가 지나고 나니 참 멋졌다는 걸 알게 되듯—
그냥 그렇게 흘러간 날들도, 결국엔 삶을 가장 빛나게 만드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억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삶 아닐까.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