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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Sep 12. 2017

살아보니, 제주는 비 오거나 흐린 날이 더 많더라.

22.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15일 차




예보대로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처음에는 잔잔한 이슬비처럼 내리더니 막상 외출하려 하니 빗줄기가 세차 진다. 

그럼에도, 아침 먹고 2시까지 늘어져 있었으니 바람도 쏘일 겸 나가보자고 문을 열었는데, 가로로 내리는 비 덕분에 우산이 무용지물이다. 


제주에 온 지 보름이 지났는데, 태풍 때를 제외하고는 그동안의 비는 꽤 신사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바람이 무서운 비'가 내리고 있다. 아이가 꿀떡할멈 책을 보고는 계속 꿀떡 노래를 하기에 그걸 사려고 나서긴 했지만, 점심을 해결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지난번 찾아놓은 ‘전설의 마녀’에 전화를 걸고 영업하는지 확인한 후 출발했다. 일요일에 영업하지 않는 곳도 있고, 동절기에는 마감이 이른 가게들도 많기 때문에 가기 전에 항상 확인해야 한다. 


도착해보니 예전에 태교여행으로 왔을 때 잠시 들렀던 편의점 건물 2층이었다. 배가 아파서 급하게 찾아갔던 곳이어서 기억에 남기도 했지만, ‘역시 사람은 자기가 왔던 곳은 어떻게든 다시 오게 된다’는 말이 떠오르는 방문이었다. 




가게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비가 와서인지 맛이 없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바다가 잘 보이는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애월 바다 같지 않다는 남편의 말에, “내가 여기에 며칠 살아보니까, 제주는 맑은 날보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이 더 많은 거 같아.”라고 마치 현지인처럼 이야기를 한다. 

그 예쁘던 물빛이 심난하다.


가게의 입구엔 마녀 할머니가 쾡한 눈을 하고 서 있는데 어른인 내가 봐도 괴기스러웠으니 아이 눈에는 공포였으리라. 자꾸 꿀떡이 어디 있는지만 묻는 아이에게, “저기 있는 마녀 할머니가 알려줄 거야. 겸이 밥 잘 먹는지 보고 있다가 알려주신대.”라고 했더니 아이는 두 말 않고 받아먹었다. 



비 오는 날씨에는 따끈하고 얼큰한 해물라면이 제격. 그동안 아이랑 지내느라 매콤한 음식을 못 먹었더니 짜기는 하지만 정말 개운하다. 전복볶음밥은 전복과 새우가 듬뿍 들어간 버터볶음밥이었는데 맛은 좋았으나, 자꾸만 본전 생각이 나는 메뉴였다. 



먹으면서 떡집을 검색하는데 가까운 떡집도 없거니와 읍내에 있는 떡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은 팩에 떡을 담아 파는 그런 곳이 아니라 미리 주문을 해야 만들어주는 그런 떡집이 대다수였다. 재미있게도, 떡을 살 수 있는 곳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마트였다. 


식사를 마치고, 마녀 할머니에게 공손한 인사를 한 후 꿀떡이 파는 곳을 물어보았다. 

이미 우리의 목적지는 정해졌지만. 


겁에 질려 마녀할머니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겸이^^;


비 오는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비도 오니 집에서 맛있는 거나 사다 편히 먹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꿀떡은 이미 다 팔리고, 다른 떡이라도 꿀떡이라고 하고 사줄까 했지만, 아이는 정확하게도 꿀떡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과자들과 생선, 그리고 청 담을 공병을 사서 애월도서관으로 갔다. 


아이야 맛집 가는 것이 무슨 재미겠는가. 책을 보거나 신나게 뛰어놀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보내야 하루가 즐겁다. 어제도 도서관 가기로 했다가 못 갔으니 오늘이라도 데려가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비는 그쳐 있었다. 


책이 많은 곳에 오니 또 신이 났다. 한라도서관에 갔다가 다시 애월도서관에 오니 그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소중함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어린이자료실이 넓지는 않지만, 아이들도 적어서 한적하게 책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유아도서는 한라도서관 못지않게 많다는 사실이었다. 제주 특유의 도서관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가까운 곳에 이런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사서 선생님이 마감시간을 알렸다. 주말에는 6시에 마감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늦게 방문한 우리는 급하게 책 5권을 빌려서 도서관을 나왔다. 


차에 오르자마자 책을 읽어 달라 하기에 한 권을 읽어주고 잠시 남편과 이야기를 하는데 아이가 잠들어있다. 오늘 낮잠을 못 잔 탓에 기절하듯 잠이 든 것이다. 깨울까 말까를 고민하다 시간도 늦었고 점심도 많이 먹었으니 그냥 재우자고 합의하고 침대에 눕혔다. 





이때를 이용해서 청귤청을 담기로 했다. 귤을 따서 베이킹소다로 씻고, 아까 사 온 공병을 소독했다. 윗집 이모가 마당에 있는 귤이 익기 전에 청귤청 한 번 담아보라고 해서 그동안 몇 번 기회를 노렸는데, 청은커녕 일기 쓸 시간도 넉넉히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비에 맞은 귤을 따는데, 상큼한 향기가 톡 하고 코를 찔렀다. 청귤은 풋귤이라는 이름처럼 채 익지 않은 어린 귤이다. 뭍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제주에서는 카페마다 청귤에이드를 판매한다. 


영귤 같은 경우는 약간 쌉쌀한 맛이 지배적인데, (내가 먹어본 영귤차는 그랬다. 달지 않고 담백한 쌉싸름함이 감도는 그런 맛이었다.) 청귤은 새콤한 맛이 더 강한 것 같다. 같은 종자인 줄 알았는데, 맛도 다르고 유래도 다르다고 한다. 초록색 껍질이 진한 것이 그 안에 노란 과육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진한 녹색이다. 



병도 소독했겠다, 이제 썰어서 설탕만 뿌리면 끝이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가 깨서 울고불고 난리다. 보통은 같이 누워서 안아주면 다시 잠드는데 오늘은 온갖 짜증에 어디가 불편하다, 물을 달라 하며 이유 없이 울어 보채니 정신이 없다. 본래 잠투정이 거의 없는 아이라 이런 경우는 드문데, 아마도 제 아빠가 와 있는 걸 알고 더 이렇게 짜증을 부리는 듯했다. 


한참 후에 진정된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논다. 이를 본 남편이 말했다.


‘아이는 사랑스러운 미치광이라고 하더니, 그 미치광이를 오늘 내가 봤다’


우리는 밤늦도록 이 사랑스러운 미치광이와 함께 미쳐서 뛰어놀았다. 



땅에 자리한 집이라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날만 맑았으면 옥상에 올라가서 별을 볼 터였다. ‘소란한 보통날’이라는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소란한 보통날 밤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오늘의 가계부}

전설의마녀 2.2만 원(해물라면 1만 원 +전복볶음밥 1.2만 원)
마트 3.5만 원(식재료 및 공병)



Today's meal     

-조식: 햄구이 +콩자반+계란후라이+어묵국 

-중식: (어른) 해물라면 (아이) 전복볶음밥  

-석식: 고등어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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