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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die Jun 22. 2023

난 소설 안 읽어

소설을 읽으면 뭐가 남는데?

난 소설을 좋아하던 아이였다고!

내 머리가 복잡한 글을 이해하기 시작한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화장실 변기 옆엔 항상 물을 머금었다 마르기를 반복해 쭈굴쭈굴해진 소설책들이 놓여있있었다.

시작은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이었다. 작은 글자가 두텁게 빼곡한 종이 덩어리였는데, 묵직한 첫인상과는 달리 읽는 동안의 손은 가벼웠다.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책이나 당시 유행했던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트와일라잇> 등 다양한 소설책을 줄줄이 읽어댔다. 그랬던 아이가 왜 '소설을 못 읽는' 어른이 되었을까.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어딜 가나 같은 말을 들었다. '책을 읽어라'.
어린 나는 그 말에 '왜요?'라고 되묻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 좋다는 건, 마치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먹어야 되는 것 마냥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의 정답이었으니까. 책을 읽고 난 후엔 '잘했어'라는 칭찬은 들었지만 '책은 어땠니?'는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물음표(?)와 친하지 않았다.


그런 후로도 접한 책은 국영수 점수를 높이기 위한 것이거나, 배울 점이 있는 근사한 인물의 이야기 정도. 더 똑똑해지기 위해 책을 들었으므로 어느 순간 책은 내게 공부였다. 그래서였을까, 머릿속을 짜릿하게 만들어주는 소설 보단 정보를 가져다주는 글을 읽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소설은 즉각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으니까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소설과, '진짜 책'과 멀어졌다. 물음표를 가질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


'왜?'라는 물음을 가지지 않는 아이였기에 책과 멀어진 것일까, 책과 거리가 먼 아이였기에 그 쉬운 물음을 가질 생각조차 못했던 것일까. 




소설을 읽으면 시간이 아까워

영화 한 편도 요약된 클립으로 보는 내게, 책은 호흡이 너무 길다. 이렇게 긴 호흡을 투자하는데, 영화 한 편 보다도 더 큰 얻음이 있어야 하지 않나? 


아침엔 배가 고프지 않는 인간이라는 걸 깨닫고, 아침밥을 먹지 않게 된 어른이 되고 나서도 소설은 여전히 읽지 못했다. 영화 몇 편을 보는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소설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잘 모르겠어서. 그러다 보니 이젠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외우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소설은 내 인생에 완전히 사라지는 듯했다.




소설책이 내 눈에 자주 띈다

나와 결혼식을 올린 남자는 정반대의 책취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에세이나 정보성 책만 읽는 반면, 그는 소설만 읽는다. 집에 쌓인 책들은 정확하게 이 카테고리로 구매자가 누군지 나뉜다. 그러다 보니 내 인생에 없을 것만 같던 소설책이 집에 가득해졌다. 궁금했다. 닮고 싶은 점이 많은 이 남자가 읽는 '소설책'엔 어떤 세상이 담겨 있는 걸까.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데 탁월한 이 남자. 그 스킬의 원천이 소설책인 걸까.

그는 보통 희한한 상상이나, 비이성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하는데 그래서 그런 걸까. 

그래도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심적 거리감은 많이 좁혀졌다.


우리 집 책방 공간

 

내 삶에 소설책이 다시 들어왔다

얼마 전, 한 카피라이터의 강연을 듣게 됐다. 그가 말하길 언제나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서, 그 사람이 좋아할 이야기를 써야 하는 것이 카피라이팅이라고. 그렇기에 소설은 중요하단다. '타인이 되어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서.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 삶에 대해 많이 고민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글쓰기, 특히나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는 글쓰기는 다를 거라고 했다.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나름 넓다고 자부했는데, 조금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내 손에 소설을 쥐어 준 가장 현실적인 트리거는 이것이었다. 

'소설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글이 가득하기에, 우리의 시선을 머무르게 하는 문장이 자주 발견된다.'

강연자였던 카피라이터님은 일상에서, 특히 소설에서 시선이 머무르는 문장이 보이면 밑줄을 치고, '필타(타이핑)'를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카피라이팅이 필요할 때마다 모아둔 필타 문서를 찾아본다고. 


책을 읽고 난 후엔 어떠한 정보를 얻고자 고집부렸던 내게 아주 현실적이고 그럴싸한 이유였다.


그렇게 나는 소설과의 첫 만남에 성공했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문장이 가득한 책이다.

나의 첫 소설책 <여름과 루비> 중 

•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일 보다 어렵다. 영혼이 무른 어린 시절엔 특히.

• 엄마가 있어야 아이 이름으로 무언가가 생길 수 있다.

• 고모의 엄격함 속 통일된 가치, 오선지를 탈선하지 않는 음표처럼 흐르던 시간이 그리웠다.

• 단어, 기분, 표현이 만나면 속을 후련하게 해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 루비의 거짓말은 그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루비는 순간을 채색하고자 했다. 미움을 받더라도.

•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 놓는다.

• '배신자'. 할머니의 등에 대고, 세 글자로 이루어진 화살을 쏘았다.

• 소문은 여기저기를 부유하므로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었다.

• '상심'이란 말이 걸렸다. 할머니와 나 사이, 또다시 강이 생겼는데 하필 그 강이 내 목 안에 생겨났다.


 <여름과 루비>를 추천해 준 나의 미금스테디클럽 동지에게 감사를 전하며, 글을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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