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가 있었다. 뭔가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상, 그 선배는 늘 여유가 있어 보였다. 말도 느릿느릿, 행동도 느릿느릿, 얼핏 나무늘보를 떠올리게 했다. 그 선배가 종종 내뱉는 말이 있었다. ‘아님 말고’
워낙 멋진 선배란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 나와는 좀 많이 달라 보이는 선배가 하는 말이었기에 그때부터 ‘아님 말고’는 내가 추구하는 모토가 됐다. 그런데 겨우 네 글자밖에 안 되는 이 ‘아님 말고’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의 나는 이래저래 참 걱정이 많았던 아이였다. 뭐 하나 무디게 넘어가는 게 없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놓고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고민했고, 누군가 툭 내뱉은 말에 그 의미를 곱씹었다. 그냥 넘어갈 만한 일에 마치 라면이라도 끓이듯 속을 부글부글 끓였고,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말도 못 하고 애만 태우기도 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니 다행이다.
성격도 유전인가 보다. 첫째가 학창 시절 나를 쏙 빼닮은 것 같다. 앞서 얘기했듯 ‘어떡하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시험 망치면 어떡하지?’, ‘공부를 못했는데 어떡하지?’, ‘공부하기 싫은데 어떡하지?’ 주로 공부에 국한된 얘기긴 하지만, 저렇게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떡하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말은 청산유수다. 머리가 복잡하면 몸을 써라, 과거는 이미 지난 거고, 미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미리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실해라 어쩌고 저쩌고, 훈계를 늘어놓긴 하지만,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고, 나 역시 이미 지나간 일에 걱정하고, 미리 사서 고생도 많이 한다.
선배를 만난 이후로 ‘아님 말고’를 불경 읊조리듯 머릿속에 담아 다니고는 있지만, ‘아님 말고’든, ‘못 먹어도 고’든 ‘고’ 자로 끝나는 말들이 참 쉽지만은 않다. ‘아님 말고’ 정신만 제대로 박혀 있어도 세상살이가 조금은 편해질 것 같은데 말이다.
많이 무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일들에 마음이 쓰인다. 나이 좀 더 들면 뭐 해 먹고살지 같은 조금 먼 미래부터 오늘 점심에 다들 약속 있으면 어떻게 밥을 먹지 같은 아주 사소한 일까지, 그렇게 읊조렸던 ‘아님 말고’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에게는 여전히 훈수를 둔다. 예전 선배 얘기하면서 ‘아님 말고’ 정신을 가지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딸아이 하는 말 “아님 말고 아님 어떡하지?”
뭐 시간이 지나면 그 예민한 마음도 무뎌지겠지만, 어쨌든 나도 그렇고, 딸도 그렇고, ‘아님 말고’를 벗 삼아 조금은 나무늘보 같은 삶을 살았으면 싶다.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