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기술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나는 매일 아침 신선한 원두를 갈아 천천히 내려 마시는 드립 커피를 좋아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맛이다. 나는 해뜨기 전 북한산에 올라가 산 봉우리에서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며 마시는 봉지 커피를 좋아한다. 성취감을 담은 맛이다. 위로가 필요한 친구를 만나 함께 마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다정한 맛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아침 산책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커피집에서 마시는 라떼를 좋아한다. 여행을 발견하는 맛이다. 갓 구운 크로와상을 같이 주문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나는 비 오는 날에 마시는 카푸치노를 좋아한다.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는 맛이다. 시나몬이 듬뿍 올려진 카푸치노는 우유 거품이 가라앉기 전에 마셔 주어야 한다. 한 여름에 혼자 책을 읽으며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더위를 잊게 해주는 맛이다. 어쩌면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은 커피 그 자체가 아니라 커피를 마시며 경험하는 삶의 순간들을 좋아한다는 말 일지도 모르겠다.
라일레이에서 뜻밖의 커피를 만난 순간은 우리가 머물 리조트에 체크인하기 두 시간 전이었다. 아오낭에서 라일레이까지 이동에 지친 아이들을 이끌고 다른 곳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짐을 맡겨두고 리조트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산속의 요새 같은 리조트였다. 근사한 수영장이 있었지만 둘째 아이는 햇볕 알레르기가 올라와 얼굴이 엉망이었고 며칠 동안 계속 수영을 한 터라 아이들은 수영도 마다했다. 두 시간 동안 아이들과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난감해하던 차에 리조트 입구에 암벽등반을 하는 장소가 눈에 띄었다. 네팔의 히말라야 어딘가에서 본듯한 나무로 지어진 산장 같은 곳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벽에 걸린 선반에는 모카포트가 차곡히 놓여 있었고 커피를 마시며 편하게 쉴 수 있는 삼각쿠션이 깔린 자리도 있었다. 우리가 쉴 곳은 바로 여기였다.
고개를 들면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을 아이스초코, 나는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켰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는 더운 날씨였지만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나뭇잎 사이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더위가 가시 었다. 카페 주인이 내가 주문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카포트에 커피가루와 물을 담고 불에 올려두었다가 물이 끓어 모카포트에서 '치익-'하고 소리가 나니 추출된 커피를 잔에 담았다. 그 사이 수동으로 만든 우유거품을 조심스럽게 잔에 올리고 시나몬 가루를 살짝 뿌려주었다. 시나몬 스틱까지 꽂아진 카푸치노는 맛보기 전부터 이미 완벽에 가까웠다. 커피의 맛은 기대한 것만큼 탁월하진 않았지만 커피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커피의 순간이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언제 어디서라도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여행의 기술, 이 기술만큼은 내 아이들이 살면서 터득해 주길 바라는 여행의 기술이다. 내가 커피를 즐기는 것처럼 사소한 즐거움이라도 좋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자기가 좋아하는 것부터 찾아야 하겠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암벽등반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엄마도 저 사람들처럼 암벽등반 한번 시도해 보면 안 될까?" 줄에 몸을 매달고 높은 암벽을 한 발 한 발 오르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의 대답은 "안돼!"였다. 혹시나 부상을 입으면 앞으로의 여행에 큰 차질이 생기니 아이들의 말에 맘을 접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땐 시도해 봐야지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