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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을 기다리며

봄이 오는 길목에서

by 여상 Mar 20. 2025

[ 목련을 기다리며 ]

나는 나무 밑을 서성이며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눈이 녹았으나 아직 찬바람이 다 떠나질 않았다. 올 것들이 모두 다 온 다음에야 네가 올 것인가? 오겠다는 약속을 꼭 내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끝내 올 것을 알기에 나는 헐벗은 나무 아래에서 너를 기다린다.

네가 온단들 오로지 나만을 향해 오는 것도 아니요, 왔단들 얼마나 머물다 가겠는가마는 미색의 고운 저고리 치마로 감싸 안은 너를 사람들을 피해 나무 저편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봄날은 황홀하다 하겠다.

그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무심히도 너는 갈 것이다. 뚝뚝 벗어던진 비단옷이 짓밟히게 하지 않으려 나는 등 돌리는 사람들보다 먼저 나와 나무 밑을 쓸어 지키고 서 있을 것이어서 핏물 바랜 너의 치맛자락을 숨김없이 보게 되나니 그 이별의 순간이 순결하였기에 더욱 처연하였음을 알았으리라.

그러면 이제 나의 봄날은 모두 가버렸으니 대낮 햇볕 아래에서 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윽고 달이 뜨면 달빛보다 맑던 너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또 나무 아래 앉아 소리를 참으며 울고 있겠다. 어느덧 연둣빛 너른 잎이 어깨를 다독이기에 오고 감의 뜻을 곱씹으며 다시 볼 날을 기다릴 것이니 너는 그렇게 나의 그리움 안에서만 살다가 잠시 다녀갈 뿐이다.
 

비 내리고 바람 불고 눈이 그치고 잊혀질 때가 되어서야 언약은 죽은 불씨처럼 되살아나 얼음이 녹아 돌아올 것들이 모두 다 돌아오고 나서야 너는 또다시 비창(悲愴)한 이별을 위해 잠시 다녀가리니 해마다 기다림으로 나의 강은 오직 깊어만 가리라.


내 고샅길을 지나 잔망스런 산수유를 마다하고 잰걸음으로 너에게 가는 것은 덧없이 떠나보낼 것을 알면서도 오직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숙명에 기대는 것이니 너는 치맛단을 여며 안고 천천히 오라. 나는 오늘도 산수유 꽃무리를 지나 헐벗은 나무 아래에서 너를 기다리리라.




내릴 눈이 다 내렸다 싶더니 오늘은 따사한 햇살이 대기를 덥혀 주었다. 산책길을 나서니 바람은 아직 찬기운을 머금고 있다. 마을 앞산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 보기도 하고, 산죽길을 헤치고 걸어 낙엽송 숲도 걸었다. 남쪽 마을에서는 꽃소식이 전해져 오는데, 우리 마을 봄은 어디까지 왔을까 하고 뒤적거려 보는 것이다. 물길을 따라 걷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가로 내려가 보았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직은 이르겠지 하며 물속을 내려다보는데, 알을 깨고 나온 치어들이 유속이 잔잔한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는 것이다. 애들이 놀랠까 싶어 살금살금 다가가 앉아 한참을 쳐다보았다. 고맙고 기특해라.


브런치 글 이미지 1


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길에 또 한 번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마을공원 어귀에 산수유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린 것이다. 연약한 가지에 앙증맞은 꽃을 피운 산수유에게도 수고 많았다고 인사를 했다. 산수유가 피었으니 이제 백목련이 올 때가 다가온 것이다. 마을 근처에 목련이 흔하지가 않아 몇 군데 눈도장을 찍어 두고 있는 참이다. 옆마을 사찰 마당에, 옆마을 창고 옆에, 그리고 후배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앞에도 조금 어린 백목련이 한 그루 서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목련은 큰 꽃망울을 지닌 채로 겨울의 후반을 지낸다. 자꾸 눈에 밟히니 오며 가며 나무를 바라보면서 이제나 피려나 저제나 피려나 하며 미리부터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새봄의 어느 꽃들이 귀하지 않겠는가마는 막 꽃망울을 터트리고 나온 백목련의 하얀 꽃은 순결하기 그지없다. 옷깃을 여민 듯 아직 꽃술을 감추고 있을 때의 모습은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한다. 그 우아한 자태란!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해마다 봄이면 목련꽃이 오기를 많이 기다리게 된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련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않는다. 꽃잎이 만개하고, 노란 꽃술을 드러내는가 싶으면 이미 꽃은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꽃잎은 시들게 되고, 시든 꽃잎은 변색이 되어 땅으로 뚝뚝 떨어진다. 떨어진 모습이 곱지 않은 것은 꽃잎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너무도 순결하고 우아한 자태와의 대비가 극적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아름답고 영화롭던 모습도 목련이요 떨어져 나뒹굴다 이리저리 밟히는 처연한 모습도 목련이니, 그 안에서 순환의 무상함을 얻어 보게 된다. 내가 목련을 애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산수유가 피었으니 백목련이 올 것이다. 목련이 오면 곧이어 개나리와 진달래가 차례로 올 것이고, 가로수길에 벚꽃들이, 산에는 산벚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엊그제 내린 눈이 끝눈이겠지 했는데, 이미 봄은 성큼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봄 #목련 

사진 : 클라우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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