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세이
[ 매화향 ]
매화꽃 흐드러지네
하얀꽃 송이마다
눈송이 하나
바람 한 줄
빗방울도 매달려 있고
추웠던 겨울밤
외로운 별빛 한 줌까지
다 모아야
매화 꽃향기
어젯밤에 옆마을 사찰 마당에 매화꽃이 개화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들뜬 마음으로 산책을 나섰다. 일주문이 저만치인데 벌써 꽃향의 끝자락이 느껴진다. 먼저 대웅전에 들러서 부처님 전에 곱게 삼배를 올린 후 걸어 나와 매화꽃을 만났다.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 나무 가지가지마다 하얀 매화꽃이 아낌없이 피어 있다.
누군가 고급진 향수라도 엎질러 놓은 것 마냥 절마당에는 매화향이 가득하고, 사람보다 먼저 꽃향기에 취한 꿀벌들이 봄볕 아래 부지런히 꽃가루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은은한 매화꽃 향기는 과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뭐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귀한 느낌이요, 우아함의 극치라고 하겠다.
이 거치른 나뭇가지에 피어 어찌 이런 향기를 세상에 내어 놓는단 말인가! 만개한 꽃천지 사이를 나도 벌 나비가 되어 왔다가 갔다가 하며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살다 보면 비바람을 맞기 마련이다. 몸이 지치고 마음이 무너진 어느 시절에 얼마간 절에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청정한 도량석 소리가 캄캄한 새벽을 깨우면서 시작되는 절의 하루. 밤을 새운 수곽의 얼음을 걷어내고, 장작을 안아다가 공양간에 불을 지핀다. 절 생활을 막 시작한 첫 해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었다.
새벽 예불을 올리고, 조촐하게 식사를 하고 나면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되었다. 군복무 이후로 삽자루 한 번 잡아보지 않고 살아온 사람에게 절간 마당일이 수월할 리 없어서 툭하면 다치거나 근육통에 시달리곤 했었다. 망가진 시설을 보수하고, 막힌 수로의 흙을 거둬내고, 스님들의 심부름을 하고, 연로하신 분들 마을까지 모셔다 드리고, 어쩌고 하고 나면 해 짧은 겨울날의 하루가 후딱 지나가곤 했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면 서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절집의 관례인지라 곶감이라도 한 두 개 얻어 홀로 쓰는 요사채 작은 방에 들어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달리 할 일은 없었다. 그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엎어질 때까지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곤 하는 것이 조그만 위로였던 것 같다.
유난히도 별이 총총했던 어느 새벽, 장작을 나르다 고단해 허리를 젖히는데, 아름다운 꼬리를 끌며 별똥별 하나가 떨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별똥별을 보면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어릴 적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그저 건강만 하세요."
죄송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아릿했다.
어려서 여름방학, 두메산골 외갓집 마당에 누워 바라보던 밤하늘에는 하늘이 좁다 싶을 정도로 별이 많았었다. 그때는 가끔 별똥별을 만나곤 했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태 고개 들어 별 한 번 쳐다보지 않고 살았구나. 그날 이후로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가 한참 동안 밤하늘의 별을 본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별똥별을 만나기도 한다. 운이 좋은 날이면.
어느 아침 여느 때처럼 분주하게 일을 하다가 문득 은은한 향기를 느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절마당 나무 나무마다 꽃이 오르는 게 아닌가. 매화꽃이었다.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매향이란 교과서 시조 안의 글자로만 아는 것이었으니, 그날 절마당에서 처음 마주한 매화향기는 내게 경이로운 만남 그 자체였다. 일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리고는 매화향에 취해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매화향을 두 계절 만나고, 나는 일주문을 떠나 나올 수 있었다. 절생활이 내게 마음을 주어 이렇게 산마을에 깃들어 살게 된 것이니, 소중한 시절인연이 그저 귀하고 고마울 뿐이다.
꽤나 운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도 굳이 들추어 보면, 저마다 힘들고 아픈 일들을 이기고 걸어온 흔적이 있기 마련이다. 크거나 잦은 고난들을 잘 이겨낸 사람은 오히려 표정이 온화하고 말투가 점잖은 경우가 많다. 삶의 여정 속에서 부딪혀 오는 곤란과 고통을 소화하면서 내력이 단단해지고, 인내의 여유가 더해지며, 세상사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분들을 만나면 향기가 느껴진다. 그 향기 안에서 공연히 나도 차분해지는 공명을 얻게 된다.
유난히도 거치른 수피, 이리저리 구부러진 가지, 그 가지가지마다 곱고 귀한 꽃봉오리를 피어내 해사한 미소와 우아한 향기를 아낌없이 내어 놓는 매화. 문득 봄매화가 어느 성숙한 삶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무 앞에 곱게 합장을 올리고 일주문을 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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