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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산마을

길가에 핀 들꽃이 보이시나요?

by 여상 Mar 13. 2025

[ 봄이 오는 산마을 ]


저 봄나무 몽우리

꽃 터지길

하루하루 기다릴 때에야

나 여기 산골에 산다고

말할 수 있겠네

시냇가에 쪼그려 앉아

송사리 알 깨기를 기다릴 때에야


길가 언덕 개불알꽃 사이사이

냉이 입맛 돌 때에야

종지그릇 하나 들고

윗동네 이여사네 묵은 된장 얻으러

콧노래로 올라갈 때에야


부서지는 햇살이

물결마다 반짝이고

봄바람이 어루만져

산마루를 깨우는 곳


개나리 진노랑 꽃잎을 열고

개구리 울 날을 고대할 때에야

내가 여기 산마을에 산다고

말할 수 있겠네


밤하늘에 북두 국자

어드메로 옮겨간 지

고개 들어 궁금하게 되어서야

여기 이 별 땅에 산다고

비로소

말할 수 있겠네


추성계곡 하류에 봄햇살이 가득하다.추성계곡 하류에 봄햇살이 가득하다.




밤에서 새벽까지 여전히 쌀쌀한 기온이 대지를 덮는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추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공기가 따뜻해지면서, 산책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두꺼운 옷 한 겹을 벗어 어깨에 걸치게 된다. 가기 싫은 겨울과 오고 싶은 봄기운이 엎치락뒤치락 밤낮으로 시루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나무에는 저마다 꽃과 잎사귀의 몽우리가 맺혀 있고, 여기저기 새싹들이 초록초록 고개를 내밀었다. 몇몇 아낙네들이 두건을 두르고 앉아 쑥과 냉이를 캐어 다듬는다. "아이고, 맛있겄네!" 하자 까르르 웃는다. 천진한 웃음이 봄햇살에 퍼져 나간다.


"벌써 시작하시는 거예요?"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들고 있는 부지런한 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고향은 여기 산마을인데 읍내에 나가 식당을 하는 두 분이다. 전에 지니고 있던 땅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데도 부부의 근면함은 변함이 없어, 식당을 운영하는 틈틈이 널찍한 텃밭을 경작한다. 갈아엎어 곱게 빗은 밭이랑이 맑은 얼굴을 드러내며 숨을 쉬면, 까치 몇 마리가 날아와 햇살을 받으며 어정어정 먹을 것을 찾는다.


나도 냉이를 조금 캐서 깨끗이 씻었다. 오늘 저녁은 봄향기 가득한 냉이 된장국!나도 냉이를 조금 캐서 깨끗이 씻었다. 오늘 저녁은 봄향기 가득한 냉이 된장국!




이곳 귀촌인들 사이에서는 '풍경도 사흘'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얼마 간은 여행지에 온 것 같이 마당에 나가 하늘만 바라봐도 '아!' 하는 신선한 감상이 느껴지지만, 생활의 매너리즘 속에서 서너 달만 지나고 나면 흐르는 냇물소리가 안 들리고 길가에 핀 들꽃이 안 보이게 된다는 것을 꼬집어 한 말이다.


나 역시 십수 년 전 이곳에서 처음 지내게 되었을 때는 이름 모르는 새들 몇 마리만 보아도 신비했고, 잠자리에 누워 멀리 물 흐르는 소리만 들어도 숨통이 트이고 행복하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골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자 주변잡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언제부터인가 길가에 풀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습관이라는 것은 참으로 질긴 것이다. 몸이 지니고 있는 습관은 말할 것도 없겠거나와 인식과 감성의 습관도 그에 버금가는 듯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린다고 했던가? 마음을 놓치고 살다 보면 어느샌가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가까운 예로, TV 없이 산 지가 십년이 넘었는데도 어쩌다 외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벽에 걸린 TV의 화면에 유재석 나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는 식이다. 늦은 나이에 악기를 배우겠다고 잠자리에 들 시간을 훌쩍 넘겨가며 기타 연습을 할 때도 그랬었다. 그럴 때는 집 앞 냇가의 물소리는커녕 처마 안에 날아드는 새들에게도 눈길이 가질 않는 것이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겠지.




한편, 촌에서의 삶이라고 무작정 환상적으로 한가한 것만은 아니다. 프레임이 느슨해진 자율적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부지런하고 성실해야만 하루를 알차게 살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평화로운 삶의 지속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활동도 지속적으로 꾀하여야 한다. 그렇게 보면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분주한 일상을 운영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처음 가졌던 귀촌의 온전한 의도와 마음을 쉬이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산과 물에 가까이 살면 좋은 것은 매 순간 의식하지 않아도 사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자연환경의 응원이 적지 않다는 것일 게다. 일상적으로는 나도 모르게 심리적으로 덜 쫓기게 되고, 가령 우중충한 날 뒤에 햇살이 아름답게 비추어 주거나, 마른 하늘에 비라도 한 번 시원하게 뿌려만 주어도 금세 주의가 환기되어 어지럽힌 머릿속을 리셋할 동기를 기 때문이다. 문득 청량한 바람만 불어 주어도...




개쑥갓이 노란 꽃을 피웠다.개쑥갓이 노란 꽃을 피웠다.


"길가에 핀 들꽃이 보이시나요?"


예전에 나를 위해 만든 '주문'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화두인 셈이다. 계절에 따라 '들꽃'은 눈꽃이 되기도 하고, 익어가는 열매가 되기도, 두견이의 노래소리가 되기도 하지만 뜻하는 바는 '이곳에 온 뜻을 잘 알아차리고 살고 있니?'로 대동소이하다.


 바야흐로 산마을에도 꽃의 날들이 이제 막 시작하려 한다. 냉이를 캐러 간 묵정밭에 개쑥갓이 벌써 꽃을 피웠고, 콩알만 한 별꽃도 앙증맞게 피어났다. 바야흐로 꽃의 날들이 시작되려는 시간, 다시금 이곳에 사는 마음을 돌아보게 되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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