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대하여
[ 망각 ]
내가 누군지 나는 몰라요
아줌마는 누군가요?
착한 소녀가
하얗게 웃음 짓는다
나비가 기억을 옮겨 놓았다
그래서
그녀는 나비를 쫒아간다
하얗게 웃으며
나비를 쫒아간다
아줌마, 배가 고파요
아줌마는 좋은 사람
나비 앉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하얗게 소녀가 웃는다
가엾은
나의 어머니
"딱 한 그릇 값을 보탰습니다. 제 먹는 음식하듯 정성스러운 식사를 주셨으니 오늘 사장님 밥값은 내가 내고 가렵니다."
단골손님께서 음식값에 팁을 얹어 주셨다. 돈을 받고 음식을 만들어 팔지만 이럴 때는 하루가 훈훈해진다. 고마운 마음나눔이다.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아직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지만 햇살이 가득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는 봄의 초입이다.
창 밖을 보니 식당 옆 고추밭에 어르신이 벌써 나와 이것 저것 주섬 주섬 일을 하고 계셨다.
"날도 쌀쌀한데 뭘 벌써 움직이세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건네 드리며 인사를 드렸다.
"아이고, 사장, 오랜만이네."
재작년 가을걷이 때 보고 이제 뵙는 것이니 꽤나 오랜만인 것이다. 어르신은 알만한 이유로 한 해 농사를 쉬셨던 것이다.
20여 년전 도시에서 대기업 근무를 은퇴하고 고향땅으로 돌아와 부부가 다정하게 벼농사, 밭농사를 하며 한가하게 살아가시던 어르신. 유교공부를 좋아하시고 서예에 능하셔서 가끔 말동무가 되어 드리곤 했는데, 불행히도 2년 전에 사모님에게 치매가 닥쳤다. 사모님은 아주 여성적인 분으로, 소녀처럼 수줍음이 많은 분이셨다. 항상 두 분이 밭일을 같이 하셨는데, 창문 너머로 옥신각신 일하시는 두 분을 지켜보면 사모님이 어르신 바라기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홀로 나와 근심스런 표정으로 고추밭을 바라보고 계시는 사모님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는데, 흠칫 놀라며 돌아서서 밭 가운데로 피해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어르신께서 초췌한 모습으로 식당에 와서 맥주 한 잔을 청하셨다.
"집사람이 치매라고 하네." 말씀 속에 깊은 허탈감이 배어 나왔다.
"이런, 이걸 어쩌나." 뭐라고 대답할 말이 궁했다.
"그냥 이대로 늙다가 잘 가면 딱 되는 것인데..."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도 가족을 건사하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잘 키워내신 어르신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고개를 떨구셨다.
식당에 혼자 오셔서 맥주를 청하며 허탈해 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모른척 안색을 살펴본다. 커피를 들고 고맙다며 밝게 웃으시는 표정 안에는 감추려 해도 묻어 나오는 외로움이 주름마다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애써 사모님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식당에 가끔 오는 옆 마을의 세 자매가 있다. 지난 가을부터 가끔 노모를 모시고 둘 또는 세 자매가 함께 식당을 다녀갔다. 거동이 조금 불편한 듯 보이는 할머니는 남다르게 예의가 바르신 분이셨다. 의례적인 인사에도 일일이 고개를 숙여 인사에 답하시는 할머니. 식사 중에 차를 내어 드리며 "어머니, 어째 드실만 하세요?" 하며 다정히 말을 건넸다. 환한 미소로 아주 맛있다고 대답하시며 나의 가족들 이야기를 하셨다. 네 네, 대답드리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초면인데다가 전혀 내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첫째 따님이 "엄마, 그만해, 어서 먹어." 하며 어머니를 챙기는 동안 막내 따님이 코를 찡끗하며 나를 보고 웃었다. 노모께서 온전치 않으셨던 것이다.
식사 후 따님들에게는 커피를, 어머니에게는 견과를 띄워 쌍화차를 선물했다. 어머니는 두 손을 합장하고 연신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다 테이블에 음식 흘린 자리를 여러 번 깨끗이 닦는 것을 보고 내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사셨길래 이리도 예의가 바르신가요."하자, 막내 따님은 활짝 웃고, 첫째 따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쓸쓸함과 고단함이 함께 담긴 미소였다. 요즘도 가끔 노모를 모시고 식당을 들리는데, 나도 모르게 어르신의 안색과 큰 따님의 안색을 같이 살피게 된다.
홀로 지내시는 연로하신 어머니께 매일 저녁 전화를 드린다. 하루를 어떻게 재미있게 보내셨는지, 저녁은 무엇으로 잡수셨는지, 특별한 일은 없는지 등등을 나누면서 유쾌한 대화를 나눈다. 누군가는 내게 자상한 아들이라고 하겠지만, 내실은 그렇지가 않다. 3분 거리 옆 단지 아파트에 사는 누님이 십수년째 부모님을 돌보는 수고를 도맡아 해왔기 때문이다. 그저 미안하고 또 죄송할 뿐이다.
두어달 전, 통화 중에 어머니의 말씀인 즉,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OO 아파트 위치를 물었는데 도통 생각이 나질 않더라는 것이다. '잘 모르겠어요.'하고 돌아서서 한참을 걸어 오다가 생각해 보니 '아! 바로 옆의 옆에 있는 아파트 단지인데 대답을 못해주었구나.'하고 그제서야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다가 내심 심장이 '덜컥'했다. 어머니께서 놀라실까봐 짐짓 별 일 아닌 듯 통화를 마치고는 바로 누님에게 전화를 하였다. 다음 날 바로 누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찾아 치매관련 검사를 받았다. 의보에서 권장하는 치매검사를 몇 달 전에 받았지만 좀 더 정밀한 검사가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결과는 매우 '정상'이었다. 연세가 드시니까 아마도 단기성 기억력이 저하되거나, 기억에 대한 순발력이 떨어지시는 것이 아닐까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었다. 이후로 정기적으로 치매관련 검사를 받는 것으로 잘 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가장 걸리기 싫은 질병 중 1위가 치매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치매는 증세에 따라 단지 기억을 잃어버리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아가 무너지게 되면 기본적인 저항력이 상실되는 것이므로 여타의 질병과 사고들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사가 치매 환자와 함께 종속되거나 무너지기도 한다. 환자와 보호자가 겪는 외로움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한다. 치매 가족을 겪은 지인들의 회고는 이 질병이 얼마나 무겁고 지독한 지를 말해준다. 가족 구성원 중 연로하신 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누구나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로한 어른이 계신 가정이나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이에 대한 사전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언급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항목이겠지만, 생활 속의 예방법이나 초기증세 대응법 등이 중요하겠고, 무엇보다 정기적인 검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현대의학도 이 질병에 대한 완치법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발견 시 지속적인 관리치료를 통해 진행속도를 현저히 늦출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정기검사를 통한 조기 발견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된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따끈한 쌍화차 한 잔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작은 위로일 뿐이다. 가족을 위로하고, 환자 분들을 위로한다. 내 자신을 돌아 보면서 가족들과 지인들과 이웃사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별 일 없이 살아가는 오늘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사진과 이미지 fr. PixaBay
#치매 #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