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길들
[ 봄날의 기도 ]
새들이 하늘 날 때
날개짐 덜어주는
때 맞은 바람
어린 새싹 일어설 때
봄비 촉촉이
굳은 땅 열어주듯이
나 살고자
한 발 앞으로 내밀 때
가만히 뒤안길
보살펴 주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
누군가에게
나도 그러한 뜻이기를
살면서 지은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봄바람에 전해지기를
밤새 조용히 내린 비로 대지가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었다.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보기 좋게 펼쳐져 있고 차갑지 않은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찰랑찰랑 깨우고 있다.
"어서 일어나. 봄이 왔어."
푸른 창공에 매 한 마리가 선회를 한다. 매가 난다는 것은 작은 동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박새 두 마리가 서로를 희롱하며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닌다. 박새들의 지저귐에 생동감이 가득 담겨 있다. 봄비가 부드럽게 어루만진 들판은 해산을 앞둔 어미처럼 큰 숨을 쉰다. 씨앗들의 발아가 시작되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이 오묘한 기운은 바로 봄기운!
촉촉이 땅을 적시는 새벽의 이슬비와 봄날 아침의 따스한 햇살, 그리고 만물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우는 온화한 바람. 오랜 시간을 견디며 준비해 온 생명의 염원들이 계절에 호응하는 진실된 순간이다. 생명의 씨앗은 근원적 원인(原因)이요, 그들의 어두운 잠을 깨우는 환경은 화연(化緣)이니 이름하여 인연(因緣)이다. 서로 호응하지 않고 홀로 서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고 화연이다. 상호의존은 삼라만상의 근본적 이치가 아닌가. 그래서 봄은 특별히 인연의 계절이다. 지금 산과 물과 들판이 조용하게 그러나 완연하게 깨어나고 있다. 이 신비하고 장대한 풍경 안에 내가 있다.
아침 8시, H누님이 운영하는 펜션에 남자 3명이 모였다. 구들방을 쓰거나 H누님네처럼 벽난로를 사용하는 집에서는 땔감이 필수적인 자원이다. 추위를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느라고 땔감을 거의 다 소진했는데, 누군가에게 귀한 땔감을 한 트럭 얻은 것이다. 트럭을 비워줘야 하기 때문에 뜨거운 믹스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는 땔감 적재 작업을 하였다. 남자 두어 명에게는 별 일도 아니지만 60 후반 여성은 혼자 할 수 없는 일. 뚝딱 일을 해치우고 나니 푸짐한 미역국에 김치, 정성스런 나물반찬이 차려져 있다.
"아이고, 수고들 했어."
"누님, 잘 먹고 갑니다."
H누님은 뿜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펜션 운영, 산나물, 고사리, 다슬기 채취, 가을에는 약초와 버섯까지 도대체 지칠 줄을 모른다. 매년 장을 담그고 김장하는 것은 기본인데, 특히 장맛은 기가 막히다. 펜션은 다슬기탕에 산나물 반찬을 못 잊어서 다시 오는 손님이 태반이다. 그런 그녀는 그 바쁜 와중에도 항상 주변을 챙긴다. 부지런하고 강인한 H누님은 귀촌 식구들 거두어 먹이는 것이 본인의 소임인 양 수시로 베푼다. 늘상 받기만 하는 후배 마음이 송구스럽기만 하다. 한편, 성격이 활달한 그녀는 후배들이 엉뚱한 짓을 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바로 불호령을 내린다. 고맙기 그지없는 H누님은 후배들의 수호신인 셈이다.
항상 웃는 얼굴의 K형님. 음악카페를 운영하시는 K형님은 늘 "나는 잡놈이야."하며 내용없는 사람처럼 껄껄 웃고 다니지만, 참으로 유쾌하고, 관대하고, 무엇보다 한결같이 마음이 고운 분이다. "차 한 잔 하자." 하고 식당에 올라오시면 둘이 앉아서 별 일도 아닌 이야기로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눈다. 음악이야기, 시국 이야기, 건강 이야기, 어느 놈 말썽 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잘 마셨다며 내려가신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무슨 거창한 충고 한 마디 없이 그저 얼굴 보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써 그가 지속적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는 것을.
열 달이나 가게문을 닫았다 열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와서 어깨를 툭 치는 단골손님들이 있다. 주인장 때문에 그간 피자를 못 먹었다고 너스레를 떨다가 한 마디 한다. "앞으로 어디 갈 거면 나한테 보고하고 가." 귀촌생활을 접기로 했던 것에 대한 나름의 경고이다. 투박하고 덤덤한 그의 위로에 마음이 촉촉해진다. 모두 심박수를 주고받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많은 따뜻한 마음을 받으며 내가 살아간다.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온기들로 나의 체온을 유지하며 살아온 것이다. 때론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교만방자하게 스스로 잘 나가고 있다고 여기던 시절에는 아예 그 손길을 느끼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삶을 돌이켜 보면 단 한 번도 그 손길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응원하고, 보호하고, 지원해 주었다. 나 스스로의 힘만 가지고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비로소 그 손길들을 실감하게 되었다.
봄이 오니 하늘과 대지의 온 생명이 역동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도움을 주고받으며 창대한 푸름을 준비하고 있다. 대자연의 이치 앞에서 겸허히 고개를 숙이며, 역량이 부족하면 마음이라도 내어 그 고마움을 갚아가면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봄 #기도 #손길 #상호의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