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봄
[ 봄맞이 ]
눈 녹은 가지에
동박이들 날아와
지저귀고 있어요
많이 춥고 힘들었죠?
나도 많이 슬펐답니다.
그래요, 우리
많이 아팠어요
깊이 옹이 진 저 나무,
시냇가 강돌마다
수많은 마모의 흔적들
아물기 쉬운 상처가 어딨겠어요
혹한의 기나긴 시간
고즈넉이 눈 비 맞은 나무와 새들
봄바람이
곱게 빗어 올린 가지에
이제 곧 새순이 돋으려나 봅니다
새봄을 맞으려면
마당을 쓸어야 해요
풀님과 꽃님이 오기 전에
세수를 좀 해야겠어요
어서요
벌떡 일어나세요
지난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왔다. 눈이 내리는 모습은 아름답고 정겨웠지만 계절의 막바지에 며칠 연속 눈이 내리던 흐린 날씨는 사람 간의 소통을 움츠리게 하며 우울한 기운을 조성하기도 했다. 길고 긴 겨울의 막바지에는 언제나 온화하고 다정한 봄바람을 기다리기 마련이지만 이번 겨울의 체감은 왠지 더 어둡고 추웠고, 그래서인지 더욱 애틋하게 봄이 기다려졌다.
지난해 몇 가지 불운한 일들이 겹치면서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산전수전 나이가 들면서 수피가 두꺼운 소나무처럼 곤란과 아픔에 대한 내성이 충분히 생겼다고 자신했건만 막상 새로운 고통과 마주치니 조금 침착해졌다는 것 말고는 딱히 달라진 것도 없이 황망스럽고 아팠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크나큰 상실은 내성을 운운할 그런 류의 슬픔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눈의 불편을 방치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 오른쪽 눈의 시력을 현저하게 잃게 되었다. 수술 이후 잦은 장거리 통원치료와 회복 등의 문제로 10개월 동안 식당문을 걸어 잠가야 했던 것도 나에게 심리적으로 큰 공백감을 주었다. 그 외에도 힘든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목젖까지 올라찬 심사를 더욱 괴롭혔다.
십 년이 넘은 귀촌생활을 접기로 결정하고 주변을 정리하려니 심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세를 내고 쓰는 구멍가게이지만 십 년 생활의 손때가 묻은 공간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했다. 이미 인수자가 나선 식당의 테라스에서 커피를 들고 사방을 둘러본다. 나무도 새들도 물길도 하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대로 아름답기만 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시력만 달라졌을 뿐이다. 잃어버린 시력 때문에 마음도 무너져 있었겠지.
내가 세상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은
너의 슬픔 때문이었다.
내가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은
너의 슬픔 때문이었다.
정호승 詩 ‘너를 사랑해’ 中
어느 가을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내가 이곳, 이 시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연히 알게 되었을 때 환한 긍정 하나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음을, 그와 같이 미래의 내 죽음도 우주 안에서의 외로운 소멸이 아님을 지식 바깥의 감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것들이란 가지기 이전에는 없었던 것임을, 어느 것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집착할 것이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새삼 상기하면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회복되지 않을 시력에 마음을 빼앗기는 대신 어지러운 마음을 치료하기로, 그렇게 어렵사리 관점의 방향을 전환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인연이 허락할 때까지 이곳 정든 산마을에서 살아가기로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던 아침이었다.
마음을 고쳐 먹는다고 갑자기 상실감이 눈 녹듯 사라지고 시력이 나아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조심스레 마음의 문을 열고, 가게 문도 다시 열었다. 요리를 재개하는 가운데 초점이 맞질 않아 손을 베이기도 하였고, 원근감각이 떨어짐으로 인해 툭하면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어딘가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익숙하지 않은 안경을 벗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하는 단골손님을 한눈에 못 알아보는 민망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풍경이 또렷이 보이지 않을 때는 속이 상하기도 했고, 특히 책을 읽을 때는 겹치는 활자에 집중할 수가 없어 낭패감을 크게 느끼기도 하였다. 아침마다 자리에 앉아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내게 주문을 걸었다. "모든 것을 수용하자. 그리고 익숙해지자."
이렇게 앉아 키보드를 치기까지는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두 눈으로 풍경의 전체를 바라보고 마음에 담은 다음 상한 쪽 눈을 감고 디테일을 다시 보는 것,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에는 안대를 착용하고 한쪽 눈만을 사용하는 것, 자주 먼산을 보고 눈을 쉬어 주는 것 등 생활하는 요령을 다시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조금 느리게, 조금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습관을 가지자 몸이 기억하고 있던 원근감각이 점차 제자리로 돌아와 주었다. 이제 물건을 잘 못 집거나 칼에 베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가까운 이들의 격려를 많이 받았는데, 고마운 마음을 이야기하기에는 이 지면이 부족하다. 그들의 응원이 가장 큰 힘이었다.
브런치 글마당 여기저기에도 차가운 겨울처럼 아픈 사연들이 있다. 세상이 별 일 없이 돌아가는 듯할 때도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시련들은 있기 마련이다. 여느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저마다의 노트에 겪어낸 일들의 기록들이 아프게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수용하고 살아내고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얻어낸 인고의 지혜들은 저마다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보석들은 그들 고유의 것들이다. 우리는 그 보석들이 발하는 빛을 얻어 보면서 각자의 빛나는 보석을 또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아픔과 슬픔을 딛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지혜와 저력. 그 글들로부터 묵직한 삶의 배움을 얻는다.
까마귀들이 짖던 자리에 동박이들이 날아와 활기롭게 놀고 있다. 연둣빛 깃털에 동그랗고 하얀 배를 자랑스럽게 내민 것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동박이 들도 왔으니 나도 이제 문 앞에까지 와 있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 이번 주에는 가게를 탈탈 털어 대청소를 해야겠다. 봄이 되었으니 계절메뉴도 한 두 개쯤 내어보자. 난방비를 아끼려고 골방에 깔아 둔 이부자리도 말끔히 세탁하여 다시 침실로 옮겨가고, 또 뭐 할 것 없나? 그래, 마음을 청소해야겠다. 가볍고 흥겨운 마음으로 굳어 있던 얼굴을 비벼 씻고 산뜻한 기분으로 새봄과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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