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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밀 Mar 22. 2017

바나나 걸이

대롱대롱 매달린 바나나의 시간

 바나나를 좋아했었다. 무엇보다도 맛있고, 소화도 잘 되고, 다이어트 식품이라고도 하고, 그런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바나나를 좋아했었다. 했었다는 과거형의 표현을 쓴 이유는 자취를 시작한 뒤로 바나나를 잘 먹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먹고 난 껍질에 벌레가 꼬이는 것은 굉장히 곤란한 문제이지만, 그것은 먹고 난 뒤의 일이고, 근본적으로 사 온 것을 제대로 다 먹기조차 힘든 것이 자취생으로 하여금 바나나에 손이 가지 않게 하는 이유였다. 쉽게 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최대한 늦게 상하기를 바라며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골라 사 온, 푸르뎅뎅한 빛을 띤 바나나를 싱크대 한편에 올려두고, 자취하는 대학생이 그렇듯 며칠간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면, 바나나는 잊힌 시간만큼 상해있곤 했다. 바닥에 닿는 부분은 눌려서 물컹해져 있고, 싱크대에는 익은 바나나로부터 나온 즙이 배어있고, 행여나 여름 이기라도 하면 날파리가... 일주일 정도 지나면 상한다는 이유로 채소조차 잘 안 먹는 판국에, 하루 이틀이면 변해버리는 바나나를 살 여유는 없었다.


 요새는 너무 피곤한 나날들을 보내느라 주말이면 집에 누워 쉬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요양하느라 방에 콕 박혀있는데, 집 안에 먹을 것이 변변찮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 근처 마트로 갔다. 바나나가 한 손에 2300원 정도 했다. 끌리는 가격. 게다가 바나나를 사면 바나나 걸이를 무료로 준단다. 인터넷에서 바나나를 어딘가에 걸어서 바닥에 닿지 않게 하면 노화가 늦어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쓰라고 만들어진 걸이가 저런 것이겠지. 글쎄, 저런 허술하게 생긴 걸이가 얼마나 효과가 있으려나 하는 의심 뒤로, 마침 좋아했던 과일이기도 하니 속는 셈 치고 한번 실험이나 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나나 걸이의 구성품은 꽤 간단했다. 노란색으로 된 2피스 부품. 바닥에 닿는 부분인 받침대 부분과, 그 위에 꽂아놓고 바나나를 걸 수 있는 걸이 부분. 조립은 둘을 연결하는 것 만으로 3초 만에 끝이 났다. 양쪽 귀퉁이를 뜯어서 균형을 맞춘 바나나를 걸이에 걸어두었다. 귀여웠다. 그렇게 디자인은 합격이고, 이제 정말로 바나나가 덜 상하는지 실험을 할 차례.

 실험은 바쁜 나날들 덕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바나나를 먹기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못하는 며칠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신없게 사흘 정도를 보냈을까, 마침내 바나나를 먹을 정도로 짬이 난 어느 날이 찾아왔다. 바나나 걸이의 효과는 굉장했다. 평소 같으면 바닥에 닿은 부분이 잔뜩 새까매져있을 바나나가, 사온 날의 빛깔 그대로 바나나 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하얀 속살도 3일이 지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이젠 앞으로 바나나를 사 먹어도 되겠네,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다른 생각이 훅 치고 올라왔다. 주말에 바나나를 사 온 주인은 하루하루 치이느라 간식 먹을 틈조차 없었는데, 저 바나나라는 녀석은 플라스틱 조각 두 개짜리 허술한 구조물에 매달려서, 유유자적 시간을 느리게 보내고 있으니. 내 순간을 걸어놓을 무언가가 있다면, 바나나를 사 왔던 그 한가한 주말을 매달아버릴 수 있다면, 그런 상상을 하면서, 잘 시간으로 달려가는 시계를 괜히 곁눈질했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물건 같은 건 없었고,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게 할 휴식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나마 1분 1초라도 더 즐겁게 보내려고, 간식으로 내온 바나나를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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