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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로 달려갈 때면 비빔면이 좋다

# 19

by 오진미



일요일 점심은 간단할수록 좋다. 아침을 먹고 나서 얼마 되지도 않았다. 진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메우는 일도, 혼자 부산을 떨어가며 무엇을 만드는 일도 부담스럽다. 이때 생각나는 건 면이다. 마트에 갔다가 들고 온 비빔면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마트 나들이에 나섰다. 특별할 것 없지만 먹거리에 둘러싸여 잠깐 서성거려 보는 것도 가끔은 재밌다. 이것저것 카트에 넣고 있는데 신제품을 소개하는 아줌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나 시식 대장인 남편과 아이들이 어느새 그 앞에 서 있다. 조그만 종이컵에 담긴 시식용은 맛만 조금 보여주는 식이니 제대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묶음 한 봉지를 카트에 넣었다.


식구 수 대로 네 봉지를 끓이기로 했다. 특별히 손 갈 것도 없다. 면과 계란을 삶아서 넣기로 했다. 면을 삶고 차가운 물에 헹군 다음 물기를 빼고 비빔 양념과 버무리면 끝이다. 면을 3분 정도 익히고 나서 차가운 물 샤워를 시키려는 데 문득 스친다. 겨울에서 봄이 넘어온 지 한 달 하고도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더워지는 느낌이다.


아이들은 반숙 계란과 면을 적당히 비벼서 먹는데 맛있다고 난리다. 시판용 비빔면의 특징 그대로 단맛과 짠맛이 적절하게 섞였다. 나와 남편의 그릇에는 아이들과는 다르게 상추와 쪽파, 양파를 올렸다. 그래야만 몸이 괜찮을 것 같은 약간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이건 비빔면을 재해석한 거야.”

채소를 올린 것을 두고 아이들에게 알렸다. 거창한 단어로 꾸몄지만, 엄밀히 말하면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언제나 라면이 생각나 설레다가도 막상 한 그릇을 먹으면 기분이 별로다. 속이 불편해서 꼭 먹고 나서는 후회가 밀려온다. 예정된 순서처럼 반복되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야채와 함께 먹는 게 버릇처럼 굳어졌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벌건 면만을 먹는 건 예의가 아닌듯했다. 상추 등 몇 가지를 넣으니 음식이 살아난다. 보기에도 참 맛있을 것 같다. 아삭한 양파와 부드러운 상추가 함께 어울려 입안에서 썩 괜찮은 맛을 만들어 주었다. 시원하면서도 국물이 없으니 깔끔하다. 언제나 면 치기 대장인 막내의 후루룩 소리가 잠시 시끄럽더니 조용해졌다. 후다닥 점심이다.


면 종류의 음식은 간단해서 좋다. 바쁘거나 그리 배고프지 않을 때 한 끼를 해결해야 할 것 같을 때 종종 찾는다. 비용과 시간을 적절히 고려해 주는 착한 메뉴다. 비빔면은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집에서 양념장을 만든다 해도 라면이 주는 탱탱한 식감은 다른 것들이 대신하기 어렵다.


비빔면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불을 가까이하기 싫은 날,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도록 최적화되었다. 처음 이것을 접했을 땐 라면인데 국물이 없고 찬물에 헹구는 게 신기했다. 세월이 흘러 더워질 무렵이면 챙겨놓는 게 되었다. 티비 광고 역시 그 시기에 유명인을 내세워 마케팅에 나선다. 부지불식간에 익숙해져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무섭다.


점심을 먹고 아이와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숲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연두 아기 잎들이 어느새 크고 제법 튼튼해졌다. 햇살 아래 있는 게 불편할 만큼 주변 공기가 데워졌다. 그늘을 찾게 되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늘 점심 비빔면을 찾게 된 이유를 밖에 나가서야 알게 되었다. 날이 그 음식을 불러들인 거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음식은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찬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봄의 절정을 이루는 철쭉과 피하고 싶은 햇볕이 있었다. 이러니 시원하고 간편한 음식이 당기는 건 당연했다. 신비하게 몸은 의식을 압도할 때가 많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표현하기 전에 입안에서 그리게 된다.


봄을 그렇게 기다렸는데 이제는 여름을 생각한다. 한낮 뜨거운 열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손과 발이 내 몸과 따로 노는 것처럼 추운 시절에는 봄을 간절히 바라고 어서 오기를 기대했다. 꽃이 핀다고, 싹이 난다고, 봄비가 땅을 촉촉이 적시어 세상이 온통 초록이 될 거라며 설레던 게 엊그제다. 그 봄을 충분히 지내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비빔면을 오랜만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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