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스며드는 선물, 크림

by 오진미


얼굴에 관심을 둔다는 건 내가 깨어 있다는 증거다. 마음이 산란해서 정신을 오롯이 세우기 어려울 땐 그냥 스킨을 바르는 것조차 잊거나 그냥 넘긴다. 무언가로 시작되어 실이 엉켜버린 듯 한 하루에는 더욱 그러하다.


요즘은 내가 잘 지내고 있나 싶다. 크림이 아주 조금 남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 집게손가락으로 훑고 지나면 끝날 정도다. 유통기한은 뚜껑을 열고 일 년이라는 데 그보다 한참이나 지나버렸다. 하루에 한 번만 사용해도 6개월이면 이미 다 쓰고 남을 시간인데, 훌쩍 넘긴만큼 마음이 요동치는 날이 많았었나 보다.


이년 전쯤인가 동생이 자기 것을 사면서 내 것도 하나 더 골랐다며 선물했다. 얼굴을 촉촉하게 해주는 수분 전용 크림이었다. 일요일 오후에 하얀 바닥을 드러낸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동생 얼굴이 거울 그림자처럼 살짝 지난다.

화장을 즐기지 않는다. 누가 보면 그저 민얼굴이다 싶을 정도다. 예전에는 이런 내 모습을 자연스러운 미를 추구한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그건 허울 좋은 포장일 뿐 화장에 서투르기도 하거니와 귀찮다. 내가 봤을 때 너무 이상하지 않을 정도면 되었다.


세월 앞에서는 변화가 생겼다. 색조 화장보다 피부가 거칠어지는 일에는 언제부턴가 예민해졌다. 얼굴이 따갑고 답답해지면서 아우성을 치는 기분이다. 한껏 뛰어서 숨이 헐떡이면 생각나는 게 물인 것처럼 내 피부가 그러했다.


그때 화장대 한편에서 고이 있는 이 크림을 발견했다. 처음 동생에게 받았을 때는 언젠가 쓰겠지 하고 미뤄두었다. 그야말로 얼굴에 119를 불어야 할 만큼 반응이 오고 당기는 느낌이 절정을 달할 때부터 이것을 발랐다. 세수하고 나서 이것을 부드럽게 전체적으로 고루 펴서 피부와 만날 때 그때부터 숨을 쉬는 느낌이다.


매일 가까이 두었다. 겨울과 봄 사이 건조해지는 날씨는 하루에 두 번 이상 크림을 찾을 만큼 필수품이 되었다. 마지막 남은 그것을 얼굴에 가져다 충분히 마사지해주었다. 무심코 하는 익숙한 행동이었는데 갑자기 뭉클해진다. 동생의 마음이 부드러운 크림처럼 나를 안아주고 토닥이는 기분이다.


이런 생각이 머물다 보니 눈에는 어느새 살짝 눈물이 비쳤다. 언제나 언니의 삶을 응원한다는 어느 날 동생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동생은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내 마음을 먼저 알고 소리 없이 들어준다. 가족이기에 더 힘들다고 하지만 같이 겪은 삶의 고비만큼이나 조금씩 더 알아가는 듯하다. 그동안 내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다고 여길 만큼 베푸는 일이 먼저인 그다.


거칠고 따가운 피부에 크림이 입혀지는 순간 불편함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건 내가 정말 힘든 순간에 전화를 걸어 눈물범벅이 되어 때로는 너무나 담담하게 털어놓은 후 이어진 동생의 피드백과 비슷하다. 몇 초 만에 거대한 산이었던 문제를 바라볼 용기가 생기는 방향의 전환점이다.


KTX로 두 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고 하면 가깝지만, 물리적 거리는 만남을 어렵게 한다.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은 얼굴을 보는 일보다 전화나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제한시키며 그 벽을 더 높고 단단하게 만들어 가는 느낌이다.


“언니의 삶을 살아.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어. 정신 차리고.”

동생은 위기의 순간마다 허우적거리는 나를 깨어나게 하는 따끔한 말을 잊지 않는다. 화장품은 대충하고 살지 말라는 동생의 부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과거와 오늘을 연결하는 상징 같다.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비바람과 햇빛과 모든 것을 받아내며 살아가는 게 얼굴이다. 그러니 그에 대해 정성을 쏟고 잘 가꿔주는 일은 당연하다. 슬프다고 힘들다고 아무렇게나 놔두고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무거운 그것에 돌을 하나 더 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얀 바닥이 드러나도록 크림을 손가락으로 뜬 다음 얼굴에 펴 발랐다. 순간 마른 화분이 물을 빨아들이듯 얼굴에 스며 피부가 촉촉해 온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내게 작은 휴식이 찾아왔다. 동생과 함께 있는 듯한 즐거운 오후의 한때를 상상한다. 커피와 예쁘게 장식된 케이크 한 조각, 적당히 여유를 주는 음악이 흐르는 식물이 가득한 카페면 좋겠다.


이제 동생이 준 크림 통이 비었다. 지난겨울의 끝자락 2월부터 봄날까지 얼굴에 공을 들였다. 크림을 바르는 일을 거른 적이 별로 없다. 어떤 사물에 마음을 담는다는 건 혼자 가야 하는 길에 든든한 친구와 함께 하는 일과 닮았다. 그 크림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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