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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May 04. 2021

조연인 듯 진짜 주연, 두부

# 27


김치와 된장, 고추장, 간장은 부엌을 지키는 터줏대감 같다. 여기에 또 하나를 불러온다면 두부라는 녀석이다. 냉장고에서 이것이 없으면 뭔가 허전하다. 찌개, 부침, 그냥 먹기, 두부김치 , 샐러드, 탕수로 그 영역은 무한대다.     


만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부엌의 숨은 고수, 부드러워서 바스러지기 쉽지만 그럴 일이 별로 없다. 특별한 생각을 하고서 두부에 힘을 주지 않는 이상 두부는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머문다. 조연인 듯 보이지만 진짜 주연이다. 두부 한모로 아침을 준비하기로 했다. 언제나 사랑받는 두부 부침과 두부 소스를 올린 샐러드.      

두부를 싫어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어린 시절 동네 구멍가게에서  몇백 원 하던 그것을 잊을 수 없다. 별맛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의 두부 심부름이 싫지 않았다. 두부를 알아갔던 모양이다.   

  

“가게 가서 두부 사 올래. 반찬도 없고 간장에 찍어서 점심 먹게.”

한걸음에 달려가면 닿는 동네 초입에 있는 가게에 가는 건 내 담당이었다. 그곳에는 아침에 만들어져 점심 무렵이면 싱싱한 두부가 배달되었다. 고기반찬에 비해 저렴했고 다른 요리가 필요 없으니 종종 밥상에 올랐다.   

  

한 사람이 들어가면 다른 이가 들어오는 게 불편해 보일 그 가게에는 적당히 깊고 넓은 통에 물을 담고 두부 대여섯 개를 둥둥 띄워서 팔았다. 요즘에는 플라스틱 상자에 포장돼 나오니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비닐에 두부 한모를 들고 와서는 간장과 참기름, 깨소금을 넣은 양념장에 찍어 먹었다. 고소하고 담백함으로 똘똘 뭉친 통통한 녀석이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다. 아침 일찍부터 밭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던 부모님이 그제야 허리를 펴는 시간이었다. 그때 두부는 농부의 지친 몸을 위로해 주었다. 김치와 푸성귀 몇 개가 전부인 밥상에 오른 소박한 정성이었다.     


맛은 시공간과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두부 전쟁이라 불릴 만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유명 브랜드보다는 로컬푸드에서 판매하는 것을 좋아한다. 500그램 한모에 3400원. 얼핏 생각하면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푸짐한 양과 꽉 찬 맛을 보장하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 국내산 콩과 천일염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서처럼 진한 매력에 먹을수록 손이 간다. 집 근처 가까운 동네에서 만들어졌다는 의식이 맞닿은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훨씬 풍부하고 담백한 편안함이 머물다 간다.     


두부 요리는 그리 복잡할 것도 고민할 이유도 없다. 재료 자체가 진미이니 무엇을 더할 일이 없다. 두부 부침은 우리 집 막내가 좋아한다. 가능한 기름을 덜 사용하기 위해 살짝 쪄서 식탁에 오르는 날에는 다음에는 두부 부침을 해달라고 조를 정도다.    

부침은 두부와 달걀 물, 식용유가 함께 한다. 두부를 원하는 크기로 도톰하게 썰고 소금을 살짝 넣은 계란옷을 입혀 식용유를 두른 팬에서 노릇노릇 지져내면 된다. 여기에 쪽파와 참기름, 깨소금을 넣은 양념장을 준비하면 금상첨화다. 두부 자체의 맛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다. 이미 심심한 간이 두부에 배어있어 먹을수록 깊이를 알게 된다.     

 

두부 소스는 야채가 들어가는 샐러드에 어울린다. 두부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후에 숟가락으로 으깨고 여기에 올리브유와 소금, 매실액을 넣고 고루 섞으면 끝이다. 아삭한 양상추와 빨강 파프리카, 찐 단호박에 호두와 아몬드, 토마토까지 이들의 본성을 해치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살짝 맛의 분위기를 살려줄 뿐이다.      


난 두부 샐러드를 사랑한다. 집에 있는 여린 상추와 양파에 간장 소스를 올린 두부 샐러드. 간장과 식초, 매실액과 참기름이 들어간 소스는 조금 쌉쌀한 상추와 두부의 부드러움, 양파의 아삭함이 입안에서 모두가 살아있다.  반찬이 없는 날,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식사다. 접시 한가득 만들어서 식탁을 채운다.     

두부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언뜻 떠오르는 건 단순함이다.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이게 되면 정체성이 흔들리고 복잡하고 어렵다. 물에 불린 콩을 갈아서 짜낸 콩 물을 끓이고 간수를 넣고 엉기게 하여 만든 게 두부다. 가장 기본적인 소금만 첨가되었으니 두부를 순수한 것이라 해도 괜찮겠다.    

   

탱글탱글한 콩알 하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잘 안다. 어릴 적 한여름이면 엄마는 콩밭에서 김을 매었고 가끔 그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봤다. 비가 오고 나면 다시 돋아날 이름 모를 풀들과 그리도 씨름하는 걸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것이 콩을 키우는 힘이었다. 콩은 섬의 거센 비바람과 강한 햇빛을 견디며 무르거나 썩지 않고 한 계절을 잘 버티었다.  그러다 가을이 오면 알알이 맺혀 줄기가 단단한 나무처럼 튼튼질 무렵이면 농부의 손에 수확되어 제 역할을 할 준비를 한다. 두부의 부드러움은 아마도 이런 어려움을 견디어낸 과정에서 피어난 꽃인지도 모를 일이다.     

 

두부는 무엇이든 펼쳐 놓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짝 감춘다. 다른 재료에 부담을 주거나 빼어나려 애쓰지도 않는다. 흔쾌히 도와줄 넉넉한 마음을 가졌다. 요리가 실패하더라도 큰 부담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내 성정이 어디에서나 누구와도 무리 없이 어울리는,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두부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두부가 아침을 든든히 해주니 마음마저 단단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니 내일도 모레도 두부를 외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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