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감자는 솔직했다

# 33

by 오진미


솔직함을 알아가는 중이다. 모두에게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단지 나와 잘 통한다는 몇몇 이들과 나누는 보통의 대화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들과 수다를 떠는 일에선 멈칫하는 자기 검열의 시간이 없다.


포장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내 상태를 보여주었을 때 오히려 편안하다. 한동안 못 만났다면 가끔 이런 시간을 가져야 숨 쉬는 기분이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여러 감정이 가슴속에 꽉 차 간다는 느낌이 들 때, 슬픔과 불안, 초조함이 몰려오는 시간이야말로 솔직해야 할 때다.


이건 비단 사람의 감정에 한정된 문제는 아닌듯하다. 금요일 오후 학교를 다녀온 아이가 간식을 찾았다. 무얼 줘야 하나 고민하다 감자가 생각났다. 마트에서 상자에 담긴 감자를 봤을 때부터 쪄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잘한 감자가 귀여워 튼튼한 몸을 뽐내는 튼실한 녀석들보다 마음이 갔다.


옥수수를 가끔 쪄먹었지만 감자는 오랜만이다. 손이 갈 것도 없다. 흙 묻은 것을 잘 씻고 냄비에 적당량 물을 넣은 다음 찜기를 넣는다. 물이 조금씩 데워지면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면 감자를 넣는다. 7개를 쪘다. 30분이 지나가니 감자 향이 살짝 난다.


약한 불로 천천히 익히기로 했다. 40여분이 지나갈 무렵 감자 빛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다 익었나 보다. 엄마는 비가 쉼 없이 이어지는 긴 장마철이면 감자를 쪘다. 솥에서 막 익은 것을 꺼내어 먹기 전에 꼭 거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걸 해보기로 했다. 깨끗한 면포에 감자를 넣어 손으로 꼭 눌러주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면 감자가 살아나. 더 맛있고.”

엄마는 언제나 무엇을 만들 때는 지나는 말로 노하우를 하나씩 알려 주었다. 신기하게도 어릴 때 들은 얘기들이 내 요리의 원천이 되었다.


하얀 사각 면포에 감자를 하나씩 넣어 엄마가 했던 과정을 거쳤다. 껍질 속에 감춰져 있는 감자 속살들이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포슬포슬한 모습에 살짝 김이 피어오른다.

아이는 설탕을 달라며 가득 찍어서 먹는다. 오랜만에 뜨거운 감자를 받아 드니 재미있다. 이손 저손을 번갈아 호호 불며 껍질을 벗기고 먹었다. 절로 미소가 나오는 맛이다. 예상에 없던 감자가 순간 피곤했던 몸을 가볍게 해 준다. 기분 좋은 담백함이다. 고소하고 부드럽다.


앉은자리에서 두 개를 먹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요리는 찐 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다. 감자가 익을 수 있도록 물과 불이 도움을 줬을 뿐이다. 감자를 처음 먹는 것도 아닌데 이리도 마음에 들어올지 몰랐다. 찐 감자가 주는 여운은 오래갔다. 입안에서 감도는 맛. 다시 먹고 싶은 생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음식을 만들다 보면 무엇을 더하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원재료의 성질보다는 화려하고 예쁘고 특별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꾸미는 일에 양념과 여러 가지가 동원된다. 오롯이 하나의 재료에 집중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찐 감자는 소박했다. 감자의 얼굴을 이토록 오래 들여다본 일은 없었다.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내 보여 준다. 부끄러움도 없고 그저 덤덤하고 당당하다.


감자는 내게 특별한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감자 농사를 한동안 지었다. 과수원 농사와 병행했는데 그때 우리 집에는 항상 감자가 있었다. 감잣국에 감자볶음, 감자 샐러드까지 감자 음식은 쉴 틈 없이 밥상에 올랐다.


그중에서 찐 감자는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밍밍한 맛에 왜 저걸 먹지하고 생각할 만큼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요즘은 찐 감자가 다시 다가왔다. 어릴 적 그 시절 감자와 같은 것인데 이토록 매력적인 맛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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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상대방에 대한 솔직한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기다. 찐 감자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기대는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바람을 담는 마음 같다. 때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싫을 때 일어나는 가슴속의 노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자는 감자다. 딸아이와 내가 기다리는 건 그냥 감자이기에 특별한 마음을 가질 일이 없다. 접시에 감자 몇 개를 담아내는 마음도 가볍다. 감자 맛을 이제야 알았다. 솔직해지는 일은 가벼움과 한 쌍을 이룬다. 포장할 일이 없으니 힘이 들어갈 일이 없다. 편안하고 그러면 당연히 마음과 몸에도 여유가 찾아온다.


찐 감자는 솔직했다. 비 오는 날이 잦아지는 계절로 접어든다. 다음에 만난 찐 감자도 이런 마음을 내게 전할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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