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갖고 왔어요. 이거 한번 써 봐요.”
제로 웨이스트 수업을 들으러 가는 차 안에서 서윤 쌤이 뭔가를 건넨다. 그는 3년 전 동화 읽기 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 자연스레 쌤이라는 호칭을 썼고 이제는 몸에 배어버려 다른 것으로 대체 불가다. 예상치 않은 선물에 기분이 좋다.
그는 모기 퇴치제, 모기약과 더불어 바래서 희미해져 가는 노란빛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낯선 것을 내밀었다.
“수세미예요. 내 것 사면서 샀어요. 한번 써봐요.”
여름이면 덮으라고 엄마가 만들어 보내준 삼베 이불 색과 닮았다. 어디서 몇 번 봤지만 쓴 적은 없다. 그것의 정체를 그때야 알았다.
잊고 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수세미 느낌이 어떨지 궁금했다. 가방을 열어보니 조용히 잠자고 있다.
“쌤 그거 쓸 때는 반으로 잘라서 해요. 그러면 오래 사용할 수 있고 좋아요.”
그의 말이 생각나 가위를 들었다. 오므라져 있던 것을 펴니 넓어지고 길이도 늘어났다.
수세미를 그렇게 만났다. 아이들 식물도감을 뒤적이다 우연이 오이같이 생긴 게 초록 줄기에 매달린 사진이 기억난다. 효소나 즙을 내어 먹으면 기관지에 좋고 반찬으로도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말려서 수세미로 쓴다고 나와 있었다. 책으로 본 게 전부였다. 주위에서 이것을 수세미로 활용하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 초가을 무렵 박넝쿨 터널을 지날 때 그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모습을 스쳤을 뿐이다.
정말 사람들이 수세미로 쓰기는 할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이 일기도 했으나 그 후로는 잊고 지냈다. 물을 적시고 만져보니 포근포근하다. 얼굴은 막내가 좋아했던 만화 스펀지밥의 날씬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2주 정도를 같이 지냈다. 신기하게도 수세미만 바뀌었을 뿐인데 설거지가 새롭다. 공장에서 찍어낸 그것은 어딘지 거칠 거나 손에 붙지 않는다. 색깔도 붉거나 초록,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예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무엇으로 저 거센 것에 색을 물들이는지 궁금해지다가도 몸에 안 좋다는 생각에서 멈췄다.
초록색 수세미에서 씨앗과 끈적끈적한 속살을 씻어내어 말린 후에야 제 모습을 갖춘다. 적당한 틈이 있어 물이 잘 빠지고 요즘 같은 강렬한 햇빛 아래 선 마른풀을 뉘어 논 모습이다. 물이 빠져나가 바짝 마른 상태는 단단하고 억세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물을 갖다 대면 다시 살아난다. 기름기가 있는 것도 깨끗하게 닦이고 조물조물해주면 금세 말끔하다.
수세미와 함께 하는 설거지가 즐거워지려 한다. 밥을 차리는 건 그렇다 해도 먹고 나서 한가득 쌓인 그릇을 보면 심란했다. 맛있는 것을 준비하는 것만 했으면 좋으련만 마지막 정리 과정이 힘들고 고달프다. 가끔은 모든 걸 던져 놓고 혼자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영화 같은 상상을 한다.
빨랫대에서 휴식 중인 수세미
이 녀석을 만나고부터는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분명 그동안 해 온 일인데 들판에서 자유롭게 돋아난 풀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살피며 노는 기분이다. 오른손바닥에는 적당히 세제가 묻어 있는 수세미가 안겨있고, 접시며 국그릇, 밥그릇을 적당히 힘주어 문지르면 반짝반짝 빛난다.
초등학교 2~3학년부터 시작된 설거지가 다르게 다가온다. 변변한 싱크대도 없던 시절이었다. 집과 연결된 바깥 수돗가 큰 대야에 물을 받고 방석에 앉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을 작은 손으로 열심이었다. 빨리 마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사용했던 낡은 초록색 수세미가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는 이것과 함께 하는 시간이 편해지려 한다. 자연에서 난 그것을 온전히 사용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가볍다. 수세미 곳곳에 흰 밥알이 붙어 있는 모습도 귀엽다. 덩그렁 달그락 쏴아 하고 쉼 없이 내리는 물소리도 시끄럽다 불평하지 않고 흘려보낸다.
수세미가 내 손안에 있는 순간은 엄마가 생각난다. 햇빛에 검게 그을리고 검버섯과 자글자글 주름진 엄마의 손을 오랜만에 살며시 잡았을 때 찾아오는 뭉클함이 머문다. 친정집 부엌에서 엄마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있고, 산을 이루는 그릇을 하나씩 정리하며 수다 떨었던 어느 여름이 그립다.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소박한 위로다. 수세미의 시간이 끝나면 다시 베란다 빨랫대 집게에 의지해서 잠깐 동안 회복의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수세미는 망중한을 즐기다 저녁이 되면 제 할 일을 열심히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수세미가 이토록 잔잔하게 천천히 내게 다가올 줄 몰랐다. 오랫동안 부엌 친구로 삼아야겠다. 호랑이 같은 여름 더위가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 녀석과 함께라면 부엌 생활을 슬기롭게 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