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면 한 번쯤
삼색 유부주머니 밥

by 오진미


밥하는 일이 하루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기분이다. 누군가는 부엌에서의 시간을 최소화해 책을 읽거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에 골몰하라고 한다. 손이 덜 간 상태의 것, 채소나 과일 자체로 먹는 게 건강에도 이로울 뿐만 아니라 여유 시간을 만들어 주는 지혜라고도 한다.


내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또 꼭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일주일을 주기로 봤을 때 두 번 정도는 강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나머지는 그냥 보통의 식탁이 적당하다고 여긴다. 요즘처럼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 때는 숨 쉬게 하는 일이 맛 난 것 먹기다. 여기에 예외가 있다. 방학이라는 꼬리표가 달리는 여름과 겨울이다. 더 촘촘해지고 하루하루가 파티까지는 아닐지라도 즐거워야 한다고 여긴다.

아침 설거지를 끝냈을 뿐인데 돌아오는 점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나의 주 고객인 아이들의 입맛을 고려한 것. ‘와’하고 감탄할 만한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데 생각나는 게 없다. 냉장고 냉동실 문을 열었다. 유부가 가득 든 투명 플라스틱 통이 눈에 들어온다.


유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걸 만들기로 했다. 집밥에서도 점심은 조금의 파격을 줄 필요가 있다. 무엇이든 지루하게 되면 빨리 피곤해지고 설렘도 줄어든다. 미로를 빠져나가는 스릴 정도는 아닐지라도 어제와 다른 변화는 필요했다.


유부 주머니 밥으로 정했다. 지난해 백화점 푸드코드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유부 주머니 안에 밥이 곧 터져 나올 것처럼 가득하고 위에는 여러 가지를 올렸다. 연어와, 제육볶음, 장어구이까지 이십여 가지가 진열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주머니 하나만 먹어도 든든하다. 여기에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집에서도 이거 할 수 있겠다. 엄마가 언제 해 줄게.”

언제나 그렇듯이 또 부도수표를 남발했다. 요리에는 무서울 게 없다는 엄마의 자신감 표현이면서도 순간의 기분에 취해 나오는 풍이다. 그러고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이다. 가끔 생각났지만 귀찮아서 모른 척하고 지났다.

오래된 숙제를 오늘은 마쳐야 할까 보다. 10시 40분을 넘어갈 무렵 다시 앞치마를 동여매었다. 전투에 나가는 장수처럼 내 부엌에서의 일을 위한 잠깐의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다. 우선 재료를 손질했다. 닭고기와 소고기는 다져두고 묵은지도 잘게 썰었다. 고기에 맛을 더할 소스는 지난주에 만들어 둔 매콤 고추장 양념이 있어서 다행이다.

닭고기는 매콤하게 소고기는 간장과 매실청 참기름만으로 단짠 한 맛을 주기로 했다. 묵은지는 언제나처럼 김치면 충분했다.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재료를 넣고 처음에는 강하게 그다음에는 중간 불로 해서 조리하면 충분히 수분이 빠져나와서 느끼하지 않다. 세 가지를 모두 다 볶아 두었다. 이제 구부능선은 넘은 셈이다.


이제 유부를 끝 부부만 살짝 잘라주어 구멍을 만들고 끓는 물에 데친다. 2~3분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소쿠리에 받혀서 차가운 물에 몇 번을 헹구는 과정을 통해 기름기를 제거한다. 그래야 담백한 유부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이제 마지막을 달려간다. 간장과 매실청, 식초, 물을 조금 놓고 끓이다가 유부를 살짝 조려준다.


식탁에 재료들을 올려놓았다. 흐리고 살짝 비가 온다. 습도가 높은 탓인지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침에 해둔 밥을 떠 놓고 손으로 작은 둥근 알을 만들어 유부 속으로 꾹꾹 눌러가면 담았다. 반복되는 이 작업이 재미있다. 밤송이 안에 들어 있는 알맹이가 떠오르기도 하고 성게 알을 다 꺼낸 갈색의 빈 성게의 모습도 살짝 스친다.


제대로 된 맛을 보여주자고 마음먹은 탓인지 여유가 있다. 다른 때 같으면 얼른 끝내기 위해서 초스피드로 행해졌을 일들이다. 하나하나에 정성이란 걸 담아본다. 그저 밥알이 옆으로 삐져나가지 않고 충분히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일 뿐인데 마음은 그 배로 쓰게 된다. 18개를 만들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새의 둥지처럼 채워졌지만 비어있다.

소고기와 매콤 닭갈비, 묵은지들을 각각 6개의 주머니에 적당히 담았다. 차 스푼을 들고 좁은 구멍 안으로 토핑을 올렸다. 칠흑 같은 밤이 생각나는 소고기 주머니와 여름의 이글거리는 태양 빛의 볶음김치, 오후의 평온함이 생각나는 닭갈비까지 모두가 완성되었다. 주머니 안에 찰싹 안기어 위로 솟아 나오지 않고 평온하게 머물러 있다.


큰 접시에 가득 꽃을 피웠다. 성으로 단단히 둘러싸여 누구도 함부로 침입하기 힘든 모양새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모습과 닮았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기에 집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최대한 이런 모습이 되고 싶다. 아침에 입은 옷이 축축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 시간 반을 훌쩍 넘겨 한 그릇을 완성했다.


유부 주머니처럼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 대학에서 심리학을 오랫동안 강의했던 선생님의 얘기가 생각난다. 어른이든 아이든 기댈 곳이 있어야 힘을 내고 살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어제보다는 빛나는 밥상을 차린 내 마음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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