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탐구 생활

by 오진미


호박과 당분간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 늙은 호박과 둥근 호박이 생겼다. 종종 계절 먹거리를 가져다주는 위층 언니가 일요일 늦은 오후에 호박을 주고 갔다.

“이거 모양은 이래도 맛있다. 지져 먹고 알아서 잘 먹어라.”

녹슨 작은 수레에 싣고 와서는 금세 가버린다.


처음에는 반가움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저녁 무렵에는 호박을 먹는 동안 온전히 썩지 않고 버텨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이 스치면서 살짝 부담되었다. 그러다 다시 부자가 된 넉넉함이 찾아온다. 초록과 늙은 호박, 적당히 익어가던 호박 두 개, 이렇게 삼총사가 모였다.


세 개의 호박을 앞에 두고 보니 여러 생각이 난다.

“호박처럼 못생겼어.”

어릴 때 사람들이 누군가의 외모에 관해 얘기할 때 들었던 말이다. 호박이 정말 그런가 하고 묻는다면 동의하기 힘들다. 호박은 호박이다. 울퉁불퉁 부푼 모습이 귀엽다. 호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사춘기 학생의 여드름처럼 올록볼록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있고 보기만 해도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것까지 제각각이다. 이리도 다른 것들을 뭉뚱그려 겉모습을 논하기는 어렵다.


호박은 잎부터 열매까지 버릴 것이 하나 없다. 까칠하지 않고 둥글둥글 한 모습에 보기만 해도 여유가 생긴다. 엄마가 과수원 빈터에 호박씨를 심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떡잎이 나고 줄기가 밭 담이며 주변 나무로 뻗어가서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십 대를 보내는 동안 언제나 가까이 있었기에 경계심도 없다. 그저 익숙해서 지나쳤고 잘 몰랐던 것이 한아름이다.


초여름 무렵부터 시작되는 호박꽃도 예쁘다. 시골집 담에 주황색 꽃이 활짝 핀 모습은 한가득 복이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운동 같다. 바라보기만 해도 꽃잎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화려하기보다는 포근하다. 어떤 이는 이 꽃 안에 밤과 대추, 온갖 잡곡이 들어간 찰밥을 넣고 초록의 미나리나 부추로 묶은 다음 쪄낸 호박꽃 밥을 만들기도 한다.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에 언젠가는 꼭 맛보고 싶다.


어릴 적부터 호박국을 좋아했다. 껍질이 초록인 젊은 청춘의 호박보다는 가을 절정의 감처럼 진한 황색의 속살이 좋다. 엄마는 물이 팔팔 끓으면 호박 껍질을 벗기고 듬성듬성 굵게 썰어서 집 간장을 놓고 호박이 익어갈 때까지 끓였다. 그릇에 담아낼 때 깨를 솔솔 뿌리면 끝이다. 호박의 달큼한 맛이 국물에 퍼져나가 담백하면서도 시원하다. 부드러운 호박을 먹다 보면 허기졌던 배가 든든했다. 단출한 시골밥상에 이 국만 있으면 한 끼가 거뜬했다.

지나다 늙은 호박을 보거나 호박이 익어가는 계절이 오면 그 국이 생각난다. 여름 더위가 살짝 힘을 잃어가기 시작할 무렵이면 호박국을 끓여 열심히 식탁에 올린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 남편과 나만을 위한 것이다. 엄마의 레시피를 머리에 그려보면서 여기에 들깻가루를 한 숟가락 더한다. 사르르 녹을 만큼 익어버린 호박과 국물은 고소한 수프를 연상시킨다. 잘 익어 투명한 호박은 그 자체로 먹기 아까울 만큼 곱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이걸 올린다.

“여보 매일 먹으니까 지겹지. 내가 너무 맛있어서. 먹어도 먹어도 난 좋더라고.”

“아니 괜찮아.”

남편의 대답은 언제나 그리 길지 않다. 나만큼 이걸 좋아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두 가지를 할 수 없으니 은근한 강요다.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니 절반의 동의가 아닐까 싶다.


집에 항상 호박을 둔다. 균형 잡힌 몸매를 자랑하는 연초록의 말끔한 애호박보다는 어느 할머니의 굽은 허리로 농사지었음 직한 늙은 호박에 끌린다. 한동안 호박 사러 갈 일이 없다. 이제부터 이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궁리의 시간이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로 속살만 물에 삶아내어 참기름과 간장만 살짝 뿌려서 먹는 호박 나물을 오랫동안 즐겼다. 번거롭지도 않거니와 오롯이 호박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여기에 깔끔함이 일품이다. 채를 썰어 밀가루를 최소한으로 한 부침도 추천할만하다. 호박죽은 어떤가? 호박을 삶아서 믹서에 갈고 찹쌀가루를 조금만 넣어 휘휘 저어주면 끝이다. 지금은 가물가물해진 맛이지만 코스트코의 호박파이도 그립다. 호박의 극적인 부드러움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촉촉한 이국의 호박 맛을 경험할만하다.


글을 쓰다 보니 호박에 대한 내 마음이 이만큼 컸나 싶다. 언젠가는 호박잎에 빠져 있었는데 이제는 호박이다. 호박이 다시 보인다. 무얼 먹어서 저리도 통통해졌을까? 무게를 재어보면 몇 킬로 정도일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호박의 빛깔은 세상에 태어난 시간의 무게다. 갓난아기는 진한 검 초록, 조금 자란 아이는 연초록이다. 한쪽이 오랫동안 흙을 이불 삼아 살았다면 희끄무레하다. 한참을 지내 할머니가 다 된 녀석들은 하얀 밀가루를 살짝 뿌려놓은 듯 묘한 황색을 선보인다. 20여 년 전 하늘로 간 외할머니의 세월이 가득 담긴 손을 닮았다. 호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비슷하지만 너무나 다른 그들이다.


언니가 선물처럼 전하고 간 호박으로 새로운 음식을 몇 번이나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보인적 없는 요리로 호박을 알아가기로 했다. 가을과 함께 호박의 재발견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여름 귤을 받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