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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Sep 14. 2021

가을밤에 만난 이웃

동네를 산책하다

  

가을 소리에 빠져든다. 낮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다시 보이는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밖을 잘 살피지 않았는데 동네 산책길에 꽃무릇이 한창이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 핀 꽃은 더 아름다웠다. 메타세콰이아 사이로 꽃들이 무더기 무더기 피어 꽃동산을 이뤘다.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시간이다. 7시를 훌쩍 넘기고 시계가 8시를 지날 무렵, 여름의 열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산책로를 걷고 있는 반소매와 반바지 차림의 사람들이 보일 때 아직도 우리 곁에 지난 계절을 잠시 생각할 뿐이다.     


요 며칠 저녁마다 밖으로 나갔다. 아침에 걷던 계획을 살짝 저녁으로 바꿨다. 막내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와 아이가 2주간의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큰아이도 자율 격리가 되었으니 내 생활도 바뀐 상황에 맞춰졌다. 그게 엄마의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해왔던 것들이 잠시 멈췄다. 아침 8시 반이면 어김없이 나가던 동네 공원을 본 지 오래다. 대신 잠깐만 나가면 되는 동네 산책로로 방향을 바꿨다.   

  

종종 저녁에 나왔지만, 초가을의 세상은 사뭇 다르다. 무슨 얘기가 그리도 하고 싶은지 끊임없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와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에 심심할 틈이 없다. 중국 매미의 시끄러운 소음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이 녀석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의 소리는 정겹다. 지나는 자동차들의 날카롭고 예민한 움직임을 무시할 만큼 귀를 쫑긋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그동안은 그저 지나치는 곤충이던 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더 강렬하고 쉼 없이 울어대는 것인지도.     


가로등 불빛이 그윽하다. 커피로 치면 카페라테 같은 느낌이다. 은은하면서도 부드럽게 어둠을 비춰준다. 나무를 지나는 바람은 시원하고 가볍다. 여름의 묵직하고 습한 기운 대신 상쾌하게 이마를 쓸어주는 게 잠시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준다. 첼리스트 하우저와 안드레아 보첼리가 함께 한 <멜로드라마>를 들으며 걷고 있으니 어느덧 여유가 찾아온다. 날마다 온 힘을 다해 빠르게 걸었던 내 발걸음은 요즘 천천히 그야말로 산책을 위한 속도에 맞춘다. 그때부터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한 태양에 가려졌던 것들이 자세히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 몇 개를 어제와 그제 사이에 발견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편과 붉은 티셔츠에 두건을 두른 부인이 천천히 얘기를 나누며 오갔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같은 곳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다시 마주쳤다. 그때 다시 보였다. 부인의 얼굴과 몸은 야위어 있었다. 남편의 손을 왜 그리 꼭 잡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주 다정한 부부로 생각하며 부러웠다. 밖에 나와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솔직함도 좋았다.


사실 확인을 해 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것을 알 도리는 없지만, 순간 스치는 게 있었다. 부인이 큰 병을 앓고 있지 않나 싶다. 중년의 여성이니 예상되는 병명은 몇 가지가 있지만, 굳이 그것을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그 단어가 지닌 두려움의 무게가 너무 크기에 그냥 모른 척하고 싶다. 그 부부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였다. 가녀린 부인의 어깨를 받아주는 남편의 다정함과 지극함에 마음이 갔다. 한참이나 모르는 그 부부에게 마음이 쏠린 탓에 길을 가다 다시 돌아보았다. 남편이 꽃을 찍고 있었다. 순간 ‘아 저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꽃을 보니 아름다워서 간직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드는 일,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아내의 모습이 다른 것도 아닌 현재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로 보였다.    

 

그들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슴이 살짝 아파지면서 부디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금’에 머무는 것이 잘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모두 입을 모은다. 다가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입을 찡그리지 말라는 ‘베일리 어게인’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내 옆에 있는 꽃들은 낮보다 더 반짝거렸다. 어둠을 꽃들이 품어 안고서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어둠만을 표현하는 화가 이야기를 다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어둠을 사랑한다고 했다. 많은 것을 품고서 빛을 내는 게 칠흑 같은 밤이라는 것. 밤은 단지 검정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색들이 살아 있었다. 보려 하지 않고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나무도 길에 떨어진 낙엽도, 열심히 걷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도 아름답다. 밤은 오늘을 보내고 또 오늘을 보내기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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