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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17. 2021

고구마에 진심인 이유


가을이면 집에 항상 고구마가 있다. 베란다 한편 종이 상자에 담겨 몇 날 며칠을 그대로 소리 없이 지낸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으려고 오가는 동안 마주칠 때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고구마의 맑은 보라색이 가을 햇살에 널어놓은 팥색과 닮았다.      


지금 당장 먹지 않아도 있는 그 자체가 좋다. 10월의 마지막 날 나와 함께 아침 비행기를 타고 우리 집을 찾았다. 엄마가 가꿔놓은 작은 고구마밭에서 조금 캐어 흙을 대충 씻고는 고운 햇살에 살짝 물기를 마르게 한 다음 귤 상자에 담겨왔다.     

 

과수원에서 돌아온 토요일 아침이었다. 고구마를 콸콸 흐르는 수돗물에 손을 적당히 움직여 가며 흙을 털어냈다. 한두 번 하고 나니 고구마 색이 보였다. 참 곱고 예뻤다. 곳곳에 상처가 났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 잠을 자다 나온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르르 미소가 흘렀다.  

    

고구마는 먹기 쉽고 편한 먹거리다. 겨울이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군고구마가 우선 떠오른다. 여기에 튀김과 빵, 샐러드, 전, 고구마 밥까지 모두가 맛있고 부담 없다. 고구마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이 가는 건 언제나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맛있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다. 가장 핵심인 건 고구마 자체가 맛있기에 실패할 확률 제로다. 이런 훌륭한 재료가 집에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어느 날은 큰 무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고구마 대여섯 개를 받았다. 지인이 주었다며 항상 나를 챙겨주는 그가 집으로 찾아와 주고 갔다. 이것을 가지고 며칠 전에 맛탕을 만들었다. 아이가 학교에 다녀올 무렵 간식을 생각하다 순식간에 완성했다. 고구마를 썰어 기름에 튀긴 다음 팬에 놓인 설탕이 갈색으로 변해갈 무렵이면 버무리면 마무리된다.    

막내가 피아노 학원을 들러 집으로 돌아올 시간인데 감감무소식이다. 휴대폰을 들고 친구네 집에 연락을 해보려는데 단짝 친구 엄마가 애들이 집으로 왔다는 문자를 보냈다. 따뜻하게 윤기 흐르는 맛탕이 다 만들어진 터라 유리그릇에 담고 그 집으로 향했다.     

 

반찬이나 과일은 종종 나눠 먹었지만 간식은 처음이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릇을 들고 가는 잠깐이었지만 발걸음이 가볍고 즐겁다. 문을 똑똑 두드리니 아이의 엄마가 나온다. 간식만 전해주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차 한잔을 하고 가라는 말에 머뭇거리다 20여 분을 머물렀다. 아이들이 맛있다고 오가며 집어 먹는다. 고구마로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것 같아 혼자 흐뭇했다.      

 

적당히 달고 부드럽다.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목이 멘다. 이때 어른들은 김치를 먹는데 난 우유를 조금 마시면 고구마의 진한 맛이 살아난다.  마트에는 생산자가 다른 고구마 봉지들이 가득하다. 집에 고구마가 떨어지면 이곳에 들러 사 오는데 그럴 때마다 봉지에 프린트된 고구마의 주인이었던 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름이 전하는 느낌을 두고 내 맘대로 농부의 스타일을 상상한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       


엄마의 고구마는 자식을 향한 그리움이다. 곁에 없어서 언제나 허전하고, 보고 싶은 이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염려의 마음을 담아낸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고, 그리 필요하지 않은 것이지만 자식들이 있기에 해마다 과수원 한편에 땅을 일궈 고구마를 심는다. 물기가 많고 달콤한 맛은 엄마의 손맛과 닮았다.  

또 다른 고구마는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는 친한 언니의 깊은 속마음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괜찮아요?”하고 살며시 묻곤 하는 그를 의지하며 지낸다. 도움을 청하면 언제라도 달려와 줄 것 같다.      


고구마 라떼를 만들어야겠다. 고구마 몇 개를 찐 다음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함께 넣고 갈아주면 끝이다. 바람 불고 싸늘해진 겨울에는 자꾸 찾게 되는 단골 메뉴다. 간단하지만  몸의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고구마를 전하는 이도, 키워낸 이들의 부지런함도 단단한 속살 안에 스며들었다.    

  

가을이 마지막을 달려간다. 동네 메타세콰이아 단풍이 그윽한 분위기가 나날이 깊어진다. 푸석거리는 낙엽 가득한 길을 걷다 돌아왔다. 고구마를 스쳐 지나갔다. 다시 가서 잠시 살폈다. 허기진 마음을 채워줄 것들이다. 함께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밀려온다. 고구마 몇 개를 들고 쪄먹기로 했다. 이것이 지금 나를 위로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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