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Feb 11. 2022

고구마 부활 작전

먹거리에 진심인 나

     

거실에 둔 고구마가 신경 쓰였다. 엄마 집에 갔을 때 식탁 밑에 웬 상자가 있었다. 직감적으로 고구마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였다. 고구마는 기온에 민감하다. 찬 곳에 두면 절로 썩어버리는 까닭에 따뜻한 곳에서 보관해야 한다. 일주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 엄마가 챙겨주는 채소며 여러 가지를 미리 택배로 보냈다. 복잡한 공항에서 줄을 서서 짐을 부치는 일은 번거롭고 힘들었기에 간편하게 다니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집에 도착하고 다음 날 온 고구마였다.     


작은 종이 쇼핑백에 두고 거실 한편에 놓았다. 한두 번 고구마전을 해 먹고는 잊고 있었다. 아침에 문득 생각나 살펴보니 싹이 나다가 곰팡이가 피어 썩어가는 중이었다. 엄마 상자에는 싱싱했는데 아파트에선 고구마 마저 답답했나 보다. 어제보다 더 따뜻한 날씨는 고구마를 그냥 놔두면 안 된다는 조급함을 부추겼다. 이미 탈이 나기 시작했기에 상처하나 없던 그때로 돌아가기도 어렵고,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썩어갈 것이 분명했다. 먹을 수 있는 대여섯 개를 골라내었다. 고구마의 마지막 목적지를 튀김으로 정했다. 껍질을 벗기고 채를 썰었다. 11시를 조금 넘길 무렵이었다. 아무리 마음대로라지만 기름 냄새를 풍기기에는 좀 이른듯한 시간이었다.  어색했지만 직행하기로 했다. 항상 놀라는 일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순간, 난 총알 탄 아줌마가 된다. 어찌나 빨리해내는지 스스로 놀랄 따름이다. 30분 정도를 하니 튀김이 큰 접시 가득 만들어졌다.     


고구마튀김의 정석으로 떠오르는 둥글거나 반달 모양에서 벗어나 채를 썰고 들쭉날쭉 삐죽삐죽 한 튀김을 만들었다. 밀가루에 계란과 차가운 물이 전부인 반죽에 고구마를 넣고 양손으로 버무리면 끝이었다. 이걸 적당한 온도의 기름에 튀겼다. 아이들은 제 할 일을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기름 냄새가 큰아이 방까지 가는 것 같은데도 무반응이지만 나 홀로 신나서 부지런히 했다. 밀가루 옷을 입은 고구마가 금세 사라졌다. 이때 찾아오는 건 안도감이다. 엄마가 아픈 무릎을 이끌고 캐내고 상자에 담아 정성으로 보관했던 그것을 그나마 살려냈다는 편안함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한 가지가 떠오른다. 내가 하는 일에서 이토록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게 있을까 하는 마음이다. 사람과의 관계, 아이들, 남편은 물론 살아가는 하루가 요리하는 것처럼 쉽게 풀리진 않는다. 그래서 내가 더 음식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재미있게 하는 게 아닐까? 타인의 다친 마음을 풀어주거나 내 가슴속에 평화가 찾아오도록 하는 일도 정말 어렵다. 많은 시간과 노력, 인내와 견딤이 필요하다. 그런데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은 어떤 것이든 먹지 못할 만큼 상하지만 않았다면 여러 형태로 부활시킬 수 있다. 모든 상황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게 화수분 같은 매력이다.     


썩은 건 도려내고, 물러진 건 그 부분을 잘라내면 된다. 말라가는 양파나 무는 국수 국물을 이루는 육수 재료로 쓸 수 있다. 멀리서도 그 냄새가 진동할 만큼인 신 김치도 물에 여러 번 씻어내어 굵은 멸치를 넣고 오랜 시간 찜을 하면 담백하고 깊은 맛을 내는 김치의 신세계를 열어준다. 내가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손과 협업하여 조금만 생각해 낸다면 비록 싱싱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것으로 탄생한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감탄할 맛을 선물할 때도 있다. 이것이 내가 부엌에서, 도마 앞에서 어디선가 모를 힘이 나는 이유일 듯하다.     


농사지은 것을 종종 갖다 주는 친한 언니가 있다.

“언니, 고마워요. 이렇게 귀한 걸 갖다 줘서.”

“네가 버리지 않고 잘 활용하니까 주는 거야. 그거면 됐어.”

초보 농부인 그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농사지은 결실인 대파와 무, 배추, 당근, 시금치, 호박 같은 것들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를 잘 안다. 나 역시 농부의 딸로 자라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하는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인사를 건네면 언제나 언니는 쓸모 있게 먹어주니 고맙다 한다. 가능한 버리는 것 없이 챙겨 먹어야 할 충분한 이유다.      


설령 채소나 과일이 제 시기를 놓쳐 상했다 해도 당황하지 말고 궁리하면 방법은 있다. 말라버린 배춧잎은 싱싱한 것을 구분 짓고 정리하면 다시 근사한 음식 재료가 되고, 그냥 먹기에는 말라 푸석해진 사과는 조림으로 만들면 뜻밖의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고구마도 이런 생각이 더해져 튀김으로 탄생했다. 스테인 레이스 작은 통에 튀김이 가득 모였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에게도 서너 개 주어야겠다. 아이의 간식으로 오늘을 채워줄 든든한 먹거리가 순식간에 완성되니 부자가 된 기분이다. 고구마에 향했던 열정이 다른 일에도 가지를 뻗어 갔으면 좋으련만 그건 아직 먼일인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흐릿한 일상을 맑게, 양배추 사과 샐러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