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것들에 손 내밀기
즐겁게 지내자. 하루를 보내며 중심에 두고 싶은 말이다. 이 짧은 문장에는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다. 우선은 고민하는 일을 줄여보자는 것이고 다른 의미는 내게 놓여 있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내게 집중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과거는 지나간 일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는 지금 내가 사는 무대다. 그러니 오늘을 잘 보내는 일이 우선이다. 매일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 부담스럽다. 온 정신과 힘을 다할 수는 없지만 무엇 하나라도 기분 좋게 하는 일들은 가능하다. 기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정의 내리고 꾸역꾸역 할 때도 있지만 종종 내버려 두고 마음 가는 대로 해도 괜찮다. 내 앞에 놓인 것들을 보이는 그대로 보고 대처해가는 일, 지금 내게 필요하다.
엄마, 언니, 오빠, 동생 온 가족이 내게 즐겁게 지내라고 말한다. 그건 아마도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지 않아 보이기에 염려를 담은 당부며 응원 같다. 이들은 전화기를 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이 말로 마무리한다. 말의 힘은 상당한 것이어서 자꾸 듣다 보니 진짜 그래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순간 머릿속에 저장되어 절로 작동하게 되나 보다.
기쁘다, 좋다, 흐뭇하다, 유쾌하다, 아기자기하다, 재미있다 …. 이 단어들은 즐겁다를 대신할 수 있는 비슷한 말들이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나 일들을 떠올려 보면 그리 대단한 게 아닐 때가 많다. 그저 순간순간 만났던 일상의 부분들이다. 다시 살며시 들어가 보면 내 마음이 쏠리는 방향으로 가보는 것. 이것이 아마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기 위한 기본인 듯하다. 항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지만 시도해 보기로 했다. 별생각 없이 지금 떠오르는 걸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다. 먹는 일에 진심인 나는 조용한 점심을 즐겁게 만들기로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혼자 남은 집안에는 해야 할 일들이 가득하지만 적당한 것이 좋다. 빨래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아침에 공원을 돌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사준 동네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아메리카노를 몇 모금 마셨다. 포털에서 뉴스를 검색하고 나서는 콜라비를 떠올렸다. 며칠 전부터 매일 먹는 야채다. 진한 빛나는 보라색의 옷을 입고, 두 갈래 초록 머리를 남겨둔 모습은 다부지고 귀엽다. 통통하면서도 심지가 굳을 것 같은 콜라비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을 두어도 쉽게 상하지 않을 만큼 어떤 상황에도 덜 흔들리는 강인함을 갖췄을 것 같다. 야채를 보면서 사람인 것 마냥 성정을 그려보는 건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말이다. 내가 없는 것들이 있을 것만 같아서 상상하다 보니, 다시 나를 바라보게 된다.
콜라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엄마가 종종 보내 주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피클을 만들어 먹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엄마가 생채가 좋다는 얘기에 처음에는 무와 함께 채를 썰어서 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다음에는 아주 얇게 썰어서 먹어보니 단단하지만 아삭한 단맛이 일품이었다. 샐러드를 만들면 순수한 그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콜라비 샐러드를 만들어 먹은 지 3일째다. 채 썬 콜라비에 식초와 올리브유를 넣으면 끝이다.
복잡하지 않다는 건 절로 반복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아이들은 외면하지만, 남편은 그래도 젓가락이 몇 차례 오갔다. 식탁에서 비타민c가 많은 야채라고 나름 소리를 높이지만 다들 관심이 없다. 남은 것을 두고 점심에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다. 식빵 두 조각을 굽고 치즈를 올리고 그 위에는 콜라비 샐러드와 아침에 먹다 남은 계란말이를 한 조각씩 넣었다. 왕방울 딸기도 썰어서 올렸다. 노랑, 하양, 빨간색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빵 한 조각을 포개어 입으로 가져가니 아삭한 소리와 함께 딸기의 새콤 달콤함, 계란의 고소함이 하나씩 다가온다.
점심으로 샌드위치 두 조각을 먹었다. 서두르는 일 없이 천천히 원하는 대로 하니 편안하다. 있는 것들을 한데 모아서 빵에 올렸다. 콜라비의 새로운 발견이다. 샌드위치의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탁월하다고 하기엔 망설여진다. 먹기 전 맛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엔 부족하다. 대충 먹지 않고 매일 돌아오는 점심 식사에서 마음 가는 대로 해 보았다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특별함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만큼의 어려움을 동반한다. 현실이라는 단단한 장벽은 실현 가능성을 줄인다. 종종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을 주문하기 하지만 선택의 문제다. 난 어느 순간부터 현재가 없는 미래에 대해선 물음표를 던지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 손을 내밀어 보는 것이 즐거움을 얻는 간단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다. 마음을 단순하게 하고 이것이 생활로 이어진다면 담백한 일상을 선물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콜라비 세 개를 생각나는 대로 요리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