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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pr 28. 2022

격리를 경계할 때

코로나 확진 가족 한집에서 따로 살기를 보내며


  

더워진다. 동네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입던 후드 집업티를 벗고 팔에 걸어 두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봄은 가고 여름이 온다. 정말 시간은 소리 없이 잘도 흐른다. 

“시간이 가니까 해결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정말 우왕좌왕 정신적 혼란이 왔는데 일주일 지나고 이제 오늘에야 모두가 집을 나갔네요.”

오랜만에 본 친구는 그동안의 일을 쉼 없이 얘기했다. 내가 한 달 전쯤에 느꼈던 일상을 경험하면서 ‘시간’만큼 좋은 약이 없다고도 했다. 코로나 확진 가족의 생활이었다. 딱 한 달이 지났다. 한 발 멀리서 그때를  돌아보다 문득 멈칫해지는 지점이 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에베레스트산보다 엄청난 위력을 자랑한다. 무게를 들어서 젤 수는 없어도 분명 무게가 있다. 코로나가 그랬다. 처음에는 너무 막연해서 조심했고, 마스크에 모든 걸 의지했다. 그러다 어떤 형태로 전파되는지를 알게 되고부터는 타인과 만남을 경계했다. 매일 아침 휴대전화 메시지와 뉴스에서 들려오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잠잠해지면 다시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 심각이라는 단어를 만날 즈음에는 다시 ‘집안이 최고야’를 외치며 집콕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우리 집 역시 코로나가 3월 중순에 지나갔다. 일주일간의 의무 격리 기간과 나머지 일주일 정도의 자발적인 유연한 격리 기간을 거쳤다. 아침에 만난 친구 역시 처음에는 집안을 움직이는 그가 확진되었다. 매 순간 너무 조심했던 엄마였기에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며칠 간격으로 한 명씩 확진되어 결국에는 다섯 가족 모두가 코로나와 싸워야 했다.  제일 먼저 걸린 그가 격리 기간을 끝낼 즈음이라 다른 가족들을 돌볼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디서 걸렸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어디 다녀온 것도 아닌데. 남편은 내가 손을 잘 안 씻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우리 집도 그랬다. 처음엔 어떻게 걸렸는지 원인을 찾으려 하다가 확진되어 집에 들어온 남편을 원망했다. 아이가 걸리고 나서는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격리자와 그렇지 않은 가족 간의 최대한 접촉 없이 무사히 지날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일이 생기면 원인을 찾아서 방법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개인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놓아두는 게 정답이었다. 


넓은 집이 아닌 보통의 아파트에서 지내는 이라면 격리를 확실히 하기도 쉽지 않다. 화장실을 분리해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적당한 간격과 소독을 번갈아 하면서 이용해야 한다. 밥 먹는 일 역시 그릇을 소독하고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영양을 고려한 밥상도 필요하다. 격리 자와 이를 보살피는 가족 간의 거리에 유독 신경을 썼다. 정서적인 부분은 별 생각이 없었기에 감정 교환은 의식하지 못했다.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크게 다가왔던 게 하나 있다. ‘격리’였다. 이제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 단어를 너무나 쉽고 단순하게  말한다. 함께 머물지 않고 따로 지내는 것, 지금과 같은 전염병 시대에 이를 차단하고 회복을 위한 가장 핵심이면서 기본이라는 의식은 뼛속까지 새겨질 정도다. 그러니 누구나 쉽게  당연한 걸로 얘기하며 흘러 보낸다. 그리고 매일 서너 번 이상 자의든 타의든 듣는 단어가 되어버리고 나서는 무감각해졌다. 


먼저 확진 판정을 받은 남편은 평소에도 움직임이 많지 않기에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아이는 심각하리만큼 스스로가 격리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빈틈없이 챙기며 생활했다. 이 둘은 3일 정도  흐른 후부터는 통증도 약화되고 회복될 기미를 보였다.  가족 모두가 격리 생활에 익숙해졌다. 막내는 내 휴대전화를 들고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남편은 재택근무가 끝나면 스포츠 경기를, 큰아이는 음악을 듣는지 휴대전화를 놓지 않았다. 한 공간 안에 나눠진 각자의 방에서 지내면서 확실히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아무도 문제의식 없이 지냈다.           


격리가 끝나갈 즈음에는 이 상황이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코로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어쩌면 익숙해 버릴지도 모르는 이런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밥을 홀로 먹는다는 건 옆에 있는 상대방의 기분을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편하다. 남편과 아이는 격리 기간 식사 시간에 맞춰 챙겨주면 문을 빼꼼히 열어서 쟁반을 가져가고 다 먹으면 빈 그릇을 내놓는다. 카톡이나 문밖에서 필요한 대화를 하지만 굳이 예전처럼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목이 부어서 불편하다는 이유였지만 상태가 좋아져도 ‘알아서 지내고 있겠지!’ 하고 지나쳤다. 확진자가 아닌 나와 막내는 좁은 방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격리 기간 중의 중반을 넘길 무렵에는 그야말로 따로 놀기였다.      


격리의 비슷한 말에는 분리, 고립, 폐쇄가 있다. 이것들을 떠올리며 상상해보면 그리 유쾌한 장면보다는 어둡거나 벗어나고 싶은 느낌이다. 만약 코로나가 아닌데 이처럼 지낸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삼시세끼를 차리는 일도 익숙해져 가고 내가 그리 신경 쓸 것이 없어져 갈 즈음에는 나 역시 이 상황에 젖어들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긴장 정도가 낮아지면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격리된 이들에 대해 관심의 불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지금의 상황이 편안했다. 최대한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으며  이렇게 거리를 두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스쳤다. 포장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무관심하고 싶은 마음도 자리하고 있었다.     


나와 내 이웃의 친구네까지 코로나를 피할 순 없었다. 가족이지만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공기를 나누지 않으며 철저하게 홀로 생활하는 시간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듯하지만 멀고, 편하다고 하면서도 어렵다고 말한다. 가족의 격리 기간을 경험하며 어느 순간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 두기가 아니라 일상의 거리도 순식간에 퍼질 수 있음을 절감했다.  이미 어디에선가 익숙해져 버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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