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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Sep 05. 2022

여름 마무리, 참외 김치

자연과 사람 사이의 일

 

일주일은 족히 지났다. 엄마가 하우스 귤을 보내면서 상자에 남은 공간이 있어 참외 3개를 보냈다.  호박만 한 참외였다. 너무 커서 한 손으로 드는 것이 힘들 정도다. 어느 날 엄마가 알려준 대로 부직포 가방에 참외를 두었더니 열흘이 다 되어가는 데도 싱싱하다.      


뉴스는 태풍에 관한 소식으로 가득하다. 엄마와 아침에 전화통화를 했다. 목소리가 별로였다. 아직은 잔뜩 흐리고 비도 바람도 없다고 하면서도 이제 얼마 없으면 시작될 태풍에 대한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엄마의 한라봉 하우스가 당연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도와줄 수도 없는 일이니 언제나 그렇듯 괜찮을 거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낮에는 후텁지근하더니 늦은 오후부터는 비가 한차례 소나기처럼 강하게 뿌리고 지났다. 날씨 때문인지 이래저래 마음이 무겁다. 제주에 피해가 없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잊어버리려 했다. 휴일은 가벼워지고 싶다. 전업주부이기에 하루하루가 휴일 아닐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가족들의 시계에 따라 내 생활이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남편과 아이의 쉬는 날이 내게도 휴일이다.     


이런 날은 다른 때보다 마음이 더 바빠진다. 다른 것에 집중해야 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다는 무의식의 발로다. 김치냉장고에서 귤을 꺼내다 참외 향이 진하게 다가왔다. 빨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미뤄 두었다. 하나는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고 두 개가 남았다. 뭘 할까 고민하다 김치를 만들기로 했다. 밭에서 딴 지 오래되었기에 속을 파내었다. 참외를 먹는다면 이 부드럽고 달콤한 속살에 더 마음이 가지만 오늘은 기꺼이 포기하기로 했다. 숟가락을 들어 긁어내니 금세 횅하니 비었다.     

참외 김치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멸치 액젓만 조금 넣고는 김치 양념에 버무렸다. 지난번 휴가로 집에 갔을 때 엄마가 제일 마음에 드는 음식이라며 꺼내놓았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게 이상하면서도 괜찮았다. 엄마는 그 김치가 올라올 때마다 참외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엄마가 몇 해 전에 참외 모종을 심었는데 새가 쪼아서 먹을 수 없게 된 게 몇 개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씨가 밭에 떨어져 싹이 나고부터는 이렇게 큰 참외가 해마다 열린다고 했다.    

 

“절로 열렸지만, 관리 안 해주면 이것도 먹기 어려워. 밭에 가서 참외가 썩지 않도록 흙이 닿는 부분에 짚을 깔아주고, 새들이 먹지 못하게 그물도 덮어주고 해서 먹는 거다.”

엄마는 당신의 노고가 얼마나 들어간 것인지 강조했다. 씨가 우연한 기회에 땅에 떨어져 생겼지만, 결론은 얼마간의 관심 속에서 먹을 수 있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적당히 퇴비를 하고 정성을 기울였기 때문인지 참외는 정말 잘 자랐다. 여름내 엄마가 따다 먹고 마지막 것을 내게 보냈다. 언제나 택배 상자가 비면 그것을 채워야 하는 게 엄마 마음이었다. 한참이나 지난 지방지 두 장에 돌돌 싸매인 참외는 밤새 먼바다를 건너고 우리 집까지 왔다. 그것을 꺼내 껍질을 벗기면서 이렇게 여름이 지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외 철이 지난 지 오래다. 마지막으로 땅에서 꿋꿋이 커갔던 그것이 이제 김치로 한 계절의 마지막을 담게 되었다. 처서가  지나니  집에서도 긴소매 옷이 때로는 어울린다. 가을이 실감 나는 즈음에 참외는 낯설면서도 묘한 지난 계절에 대한 연민 같은 게 생기게 했다.  

   

여름이 정중앙이던 그때는 그저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잘 지냈다고 나를 다독이고 있었지만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해 보고 여름을 보내버린 것 같다. 아쉬움과 후회가 틈틈이 밀려온다. 무엇을 원했는지는 선명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랬다. 그래서 이 참외 두 개를 잘 슬기롭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외는 엄마의 노력이 더해져 긴 더위와 비바람을 이겨 내었다. 참외 김치가 작은 김치통에 가득 담겼다. 이것이 내 곁에 있는 동안은 그래도 그리워진 여름의 어느 때를 보내는 것이라고 위안해 본다. 


참외는 작은 것이라도 눈여겨보고 지나치지 않는 농부의 세심한 눈썰미와 정성이 더해져 사라지지 않고 잘 커갔다. 매일 밭에 가는 엄마는 땅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는다. 참외 싹을 보았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 그렇게 여름 한 철을 키워내었다. 참외를 김치 양념에 버무리고는 맛을 보았다. 역시나 은은한 달콤함이 머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절로 되어가는 일이 정말 많다. 그러면서도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야 생각보다 좋은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미 가을이 왔지만 참외 김치를 먹으며 여름과 작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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