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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23. 2022

빛나는 잡채처럼

음식과 풍경

“우리 엄마가 오늘 시험 끝났다고 잡채 해준다고 했어.”

시내버스가 버스 정류장에 서더니 여고생 무리가 후다닥 올라탄다. 친구 사이인 듯한 여고생 두 명이 내 자리 옆으로 와서 서더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갑자기 한 친구가 다른 이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집에 가면 잡채를 먹을 것이라며 좋아했다.      


잡채를 만드는 날에는 이상하게 그날 풍경이 종종 떠오른다. 엄마가 시험 보느라 고생한 딸을 위해 잡채를 준비해 놓는 마음과 그것을 기다리는 아이의 설렘이 내게 가슴에 깊이 저장되었던 모양이다. 어떤 음식이든 누군가에게 보통의 것이 아니라 특별함으로 다가간다면 제 역할을 아주 잘하는 거라 생각된다. 온기가 머문 음식이 지닌 메시지는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 내는 강한 힘이 되어 버티게 한다. 타인의 경험을 통해서 잡채를 다시 보게 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잡채를 특별히 여기던 제삿날도 생각났다. 골목을 두고 친척들이 모여 살았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제삿날이면 잡채를 빠트리지 않았다. 거리로는 가까웠지만 농사일로 모두가 바쁘게 지냈다. 친척들이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가 제삿날이었다. 큰집, 작은할머니네 등 우리 집을 중심으로 앞 뒷집이 몇 달을 주기로 제사가 있었다. 그때마다 정성을 들인다는 의미로 잡채를 밥상에 올렸다. 그 시절 시골 잡채는 시금치와 당근, 버섯이 들어간 소박한 것이었다.    

  

친척 어르신들은 항상 여러 야채와 당면을 섞고 나면 옆에 있는 이들에게 맛보기를 권했다. 식구들끼리 먹는 것이라면 좀 부족해도 괜찮지만 여러 사람의 상에 올리는 음식은 신경 쓰이기 마련이었다. 제사상에 올린 음식이 다시 우리의 밥상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맛보는  음복 시간에 색다른 게 잡채였다. 제사상의 음식은 화려한 색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근이 어울려 있는 잡채는 가지런한 접시들 사이에서 유독 빛났다.      

아침에 잡채를 만들었다. 저녁에 미뤄둔 설거지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결심한 일이었다. 표고와 새송이버섯, 당근과 풋고추를 넣기로 했다. 도마 위에 야채들을 채 썰어서 보니 그런대로 색의 조합이 괜찮다. 기대가 피어났다. 특별한 게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은 맛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야채를 볶고 당면을 6분 삶았다. 당면 포장지 뒷면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는 게 최적의 면발을 유지하는 방법이란 걸 얼마 전부터 알게 되었다. 가끔 그럼에도 예상을 벗어나 실망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정답처럼 딱 알맞은 상태였다.     


먼저 당면에 간장과 참기름, 매실청을 아주 조금만 넣고 버무린 다음 다른 야채들도 함께 어울리도록 잘 섞었다. 잡채 끝이다. 무엇을 했다고도 할 수 없을 만큼  후다닥 마무리되었다. 접시에 담아 보니 시작할 때의 야채 색이 그대로다. 먹지 않아도 따뜻한 분위기가 전해온다. 

      

잡채는 어울림의 음식이다. 여러 재료가 당면과 만나 함께 머물러야 제 역할을 한다. 당면이, 고기가, 야채가 훌륭하다고 성공적인 잡채를 만들 수도 없다. 모두가 그런대로 괜찮은 맛으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기꺼이 품어줘야 한다.    

 

날마다 다름을 맞닥뜨리며 산다. 내가 어제 마음먹었던 일도, 불과 몇 분 전의 생각도 지금과는 다를 때가 있다. 그 지점에서 어떻게 절충하고 조화를 이룰지가 하루를 잘 보내는 방법 같다. 요즘은 그 지점에서 자꾸 어긋난다. 어제의 다짐은 그대로인데 내 행동은 멈추어있기에 답답함이 밀려온다.  별생각 없이 잡채를 만들면서 이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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