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Mar 17. 2023

선생님의 카레

 진심 한 그릇

한 그릇의 음식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있다. 그건 추억과 함께 숨 쉬어 어떤 날을 떠올리게 한다. 요리의 색깔, 맛은 물론 계절과 날씨, 주변을 흘렀던 공기의 느낌까지 어렴풋하게 그려진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제주의 여름은 어느 곳보다 강하다. 거센 소나기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태풍에 바닷 기운을 품은 습한 기운은 온 섬을 감싼다. 뜨거운 계절이 기다려질 때도 있지만 조금은 서서히 지쳐가는 시작점이었다.     


중산간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난 중학교 3학년 시기에 잠깐 학교 옆 고모 집에서 지냈다. 고모의 집은 긴 골목을 지나 조용한 마을 한편에 마당을 두고 집 두 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중 작은 별채인 듯 보이는 곳에 30대 중반의 국어 선생님이 지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제주시내에서 출퇴근하기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았고, 직접 운전해서 다니는 이들도 적었다. 그래서 종종 시골집을 빌려서 사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우유 카레 

난 그때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고모 집에 머물던 선생님이 담당이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원고를 쓰고 선생님께 확인을 받으려고 간 저녁이었다. 선생님은 뭔가 부지런히 만들고 있었다.     


뭔지 모르는 강한 향이 작은 부엌 겸 거실인 공간을 가득 채웠다. 선생님은 밥 먹고 얘기하자며 뚝딱 한 상을 차려 내었다. 갓 지은 밥 위에 올려진 카레와 옆에는 깻잎 김치가 놓였다. 수업에서 만나지 않은 선생님과 얼굴을 마주 보며 밥을 먹는 일은 정말 어색했다.     


처음에는 밥상에 고개를 푹 숙여 먹는 일에 집중했다. 선명하진 않지만 그때가 카레를 처음 먹지 않았나 싶다.  고모가 밭에서 키워 전해 준 깻잎에 간장양념이 들어간 김치와 이국의 맛이란 게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카레는 묘하게 어울렸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선생님이 차려준 카레밥상이었다. 소박하지만 떨림과 감동이 교차했다. 내가 쓴 글이 주제에 맞는지 망설이고 있던 내게 선생님은 편안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조금 더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몇 주 동안 연습하고 웅변대회에 나갔지만 수상하지는 못하고 끝났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실망도 없었다. 30여 년 전 그때가 기억나는 건 선생님의 밥 때문이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집으로 불러 밥을 함께하는 건 마음을 기꺼이 내어준다는 의미다. 아무리 간단한 차린 식탁일지라도 내 공간을 열고 얼굴을 마주하며 따뜻한 밥을 같은 시간에 먹는 일은 상대방에게 말로 하지 못하는 여러 감정을 전하는 일이다.     


주부가 되면서 누구를 집으로 불러 밥을 먹는 진심을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안 되는 찬이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재료를 준비했을 시간들, 시장을 오고 간 발품, 불 앞에서 음식을 조리한 노력이 밥상 위에 펼쳐진다. 애써 차린 게 없다고 둘러대지만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이 모인 자리다.    


그 후로 셀 수 없을 정도의 카레를 먹었다. 집에서 간단하게 차린 것도 있고 전문 식탁에서 경험한 인도나 일본풍 카레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기억나는 건 여름날 선생님의 카레였다.      


온몸이 끈적거릴 만큼 후텁지근했던 그때, 카레향은 그런 불쾌함을 날려버렸다. 선생님 앞에서의 긴장감 이전에 낯선 맛에 정신이 쏠렸다. 그리고 선생님과 밥을 먹었다고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혼자 으쓱했다. 대회에 나간다는 긴장감대신 즐거운 경험이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아이에게 저녁으로 카레를 만들어 주었다. 

“엄마, 우유 카레로.”

아이는 짧은 주문을 남기고 숙제에 열심이다. 양파와 당근, 양배추와, 통조림 햄 집에 있는 재료를 손질하다 문득 그때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 후로 관계를 이어가지도 않았지만 선생님의 빙그레 미소는 선명하다. 밥을 함께 먹어서였을까? 밥으로 기억되는 선생님, 그건 솔직한 배려이며 진한 따뜻함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없는 대화, 전복밥과 달래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