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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n 27. 2023

이제 알게 된 매실

매실청 담던 날 풍경 

매실청을 담갔다. 지난해는 현충일 무렵에 했는데 올해는 2주 정도 늦어졌다. 매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매실청을 떠올렸지만 차일피일 미뤘다.     


마트에서 매실이 잘 보이지 않을 무렵이 되어서야 급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실행하지 않으면 올해는 그냥 지나버릴 것만 같다.     


토요일 아침 일찍 로컬 푸드에 갔다. 곡성에서 농사지은 매실 3박스가 놓여있다. 10킬로그램 한 상자를 샀다. 막상 집에 돌아오니  바로 청을 담기가 귀찮다.     

 

하룻밤을 재우고 나서 일요일 아침부터 서둘렀다. 넓은 스테인리스 통에 매실을 쏟아부은 다음 물로 씻었다. 회사 다닐 때도 종종 청을 담갔으니 오래된 연례행사다.   

   

둥글둥글 단단한 매실은 저마다 같은 얼굴인 듯 하지만 다르다. 초록인 듯하면서도 노랗다. 어떤 건 햇빛을 맡지 못했는지 힘없어 보이는 연두다. 


잘 익었는지 습기에 지쳐버린 것인지 헷갈릴 만큼 물렁거리는 것도 서너 개 이상 나온다. 진한 초록의 매실은 굳은 의지를 한 누구의 얼굴과 닮았다.     


다른 때 같으면 서둘러 끝낼 일이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매실이 손에 닿는 느낌이 신선했다. 탱탱하니 마음껏 주물러도 괜찮았다. 맑은 물에서 빛나는 매실은 그림이었다.     


자연이 마음대로 색칠한 캔버스 같다. 몇 해 전 제주에 있는 김창렬미술관에서 경험했던 물방울 작품도 떠올랐다.      


초록의 투명함은 비슷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다른 매실이 한 곳에 모였다. 물속에서 매실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통 튀게 하는 가벼움이다.     

물속에서 빛나는 초록 매실


일대일 비율로 설탕에 버무려진 매실은 백일 정도가 지나면 제법 청이 되어간다. 그때면 이 시간을 기억하고 부지런히 잘했구나 혼자 칭찬할 것이다.


해마다 매실청을 담는 과정이 그러했다. 매실을 사서 집에 오는 순간부터 빨리 씻고 마무리하는 일에 바빴다. 빨리 끝내야 마음이 편해지는, 학교 숙제를 남겨둔 아이의 마음이었다.   

  

어찌 보면 그동안 매실청 담기는 재미없는 일이었다. 의무감처럼 여름 무렵이면  하는 집안일 중에 하나였다.  매실청은 현재보다 미래를 향해있었다. 뜨거운 여름과 가을 겨울을 보내고 내년 어느 즈음에 맛보게 될 것. 


일을 하다 보면 결과물보다 한동안 고민하며 매달렸던 시간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당시에는 언제 그때를 벗어날까 바라지만 지나고 나면 그때가 그립다. 풋풋한 향기가 주위를 맴돈다. 

 

스쳐 지나가는 것일지라도 가끔은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몰랐던 느낌들이 다가온다. 나를 향하는 일상은 이처럼 내가 하는 일을 잘 살펴보는 것.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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