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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Oct 07. 2020

샌드위치의 위로

나만을 위한 점심 한 끼


  

 두 아이가 학교에 갔다. 당연한 일상이 특별한 일이 되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한 아침이다. 서둘러 집안을 대충 치웠다. 머뭇거릴 틈 없이 내 시간을 누리고 싶다. 신데렐라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뛰쳐나오듯 정오 즈음이면 막내가 집으로 오는 까닭이다.     


 그동안 잠자던 책을 꺼내 들었다. 독서는 일정 시간을 꾸준히 해야 하는 일임에도 쉽지가 않다. 마지막으로 책을 꺼내 든 게 일주일 전이다. 사막의 여행자가 끝없는 모래벌판을 거닐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읽었다.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안겨주는 위로와 격려가 마음속으로 전해왔다. 악기를 배우며 리듬을 알아가듯 이야기들이 선명해질 무렵 멈춰버렸다. 다시 시 돌아와 보니 어떤 것도 그려지지 않는다. 찬찬히 귀한 물건을 다루듯 페이지를 넘겨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머리에 스치는 건 나만을 위한 점심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으로 차리던 식탁이었다. 나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다. 삶은 계란을 주인공으로 해서 게맛살과 오이가 조연이다. 여기에 마요네즈와 설탕을 더하면 적당히 느끼하고 부드러운 맛이 꽤 괜찮은 조합이다. 빵에 샐러드를 바르고 나서 그려지는 풍경은 봄날 들판에 핀 야생화들의 작은 속삭임이다. 날이 흐리거나 비 오는 날 기분이 우울할 때는 이것만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게 없다. 여기에 보너스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이면 완벽한 조화다.    

 샌드위치를 처음 접한 것은 무려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체육대회 날 직장에 다니던 언니는 식빵에 집에서 나는 나물이며 분홍색 소시지를 넣은 특별한 점심을 만들어 주었다.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모양이었지만 샌드위치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던 때라 도시락을 준비해 온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언니이며 동시에 엄마이던 자취생 시절에는 동생의 간식으로 가끔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여고생 시절에는 요리책을 탐독했었다. 대학생이 되고서는 그때의 간접 경험을 실전으로 옮겼다. 늦은 밤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는 동생을 위해 귀엽고 앙증맞은 롤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식빵을 펴서 평평하게 한 다음 켄터키 후랑크 소시지를 넣고 돌돌 말면 끝이다. 모양을 위해 랩으로 단단히 포장했다. 동생이 자취방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면 예쁘게 썰어 놓고는 기다렸다. 밀려오는 뿌듯함과 동생의 찬사에 들뜬 깊은 밤이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는 길거리표 샌드위치가 아침 무거운 기분을 날려주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려가는 계단 바로 옆에는 항상 부지런한 아버지와 딸이 운영하는 토스트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어둑어둑한 새벽부터 부지런히 준비한 신선한 야채와 기분 좋은 미소가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냥 지나치려 해도 마가린에 빵이 구워지는 고소한 향이 주변으로 퍼져 일주일에 한두 번은 들르는 단골 가게가 됐다.  

   

 따끈한 샌드위치가 담긴 검정 비닐을 들고 지하철에 오르면 이때부터 인고의 시간이다. 아저씨에게 신신당부해서 은박 포일로 아무리 꽁꽁 싸도 새어 나오는 맛있는 냄새를 어쩔 수 없다. 몇 분을 달려 회사에 도착해서야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빵을 허겁지겁 먹는다. 혼자 먹는 미안한 마음에 살짝 동료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불편함과 먹는 기쁨이 공존하는 아침이었다.  가끔 동료들의 샌드위치를 챙겨 가는 날은 주머니가 가벼워도 기분이 좋았다. 마음은 주고받는 것이라 했던가. 그러던 어느 날 배에서 꼬르륵하는 순간 옆자리 선배가 예상치도 않은 김밥이나 빵 한 봉지를 던져 주고 가는 날이면 감동이 밀려왔다.

     

샌드위치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다 보니 마음이 급해진다. 계란부터 삶아야겠다. 

- 계란 5개를 끓는 물에 넣었다. 반숙과 완숙 사이 노른자가 적당히 익은 상태가 풍미를 좋게 하는데 8~9분 정도 익히면 충분하다. 

- 여기에 맛살을 적당한 크기로 썬다. 오이는 채 썬 다음 소금에 살짝 절여 수분을 뺀다. 

- 재료가 담긴 볼에 마요네즈와 설탕을 한 스푼을 넣고 잘 섞으면 완성이다. 

- 빵을 채울 재료들이 준비되면 식빵을 노릇노릇하게 구워낸다. 빵을 일찍 구우면 특유의 바삭한 식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 빵 사이에 샐러드를 충분히 넣고 다른 빵으로 위를 덮어주면 끝이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싶은 날이다.  오픈 샌드위치로  정했다.

    

 샌드위치 전성시대다. 단순한 듯 하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단품 음식이다. 빵에 넣는 재료에 따라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 취향 존중 시대에 어울린다. 보기만 해도 뭔가 있어 보이는 고급스러운 것부터 누구나 손쉽게 먹는 햄 계란 샌드위치까지 모두가 나만의 샌드위치를 창조하는 개발자다. 지난겨울 의사들의 세계를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린 드라마에선 계란이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이 종종 등장했다. 힘들었을 하루 중 입을 크게 벌려 ‘아~앙’하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그들이 느꼈을 기쁨을 상상해 본다. 무아지경이라면 과장을 조금 보탠 솔직한 심정 아닐까.     


 샌드위치를 마주한 건 시간을 여유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밥과 함께 하는 식사가 부담스러운 날 소박한 접시에 모든 걸 담을 수 있는 샌드위치가 적격이다. 달콤함에 고소함을 더한 빵이 입안에서 나를 웃게 한다. 아침부터 따스한 햇살이 비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적당히 꾸물거리는 완연한 가을날이다.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를 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화를 누려본다.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언제나 반복이지만 쉼 없는 에너지를 요구한다. 당연히 내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을 붙잡고 해내는 일은 간단치 않다. 주부와 엄마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요즘이다. 순박한 한 끼로 오랜만에 찾아온 나만의 시간에 빠진다. 

“엄마 나야 문 열어줘.”

막내가 돌아왔다. 벌써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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