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의 위로, 성심당 순수롤
아이를 통해 아주 오래전 나를 만난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와 그럭저럭 지낼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정말 나 혼자야 하는 기분이 들 만큼 외로울 때도 많았다. 그때는 학교 가는 아침이 어느 때보다 싫었다. 우리 집 막내가 요즘 그런 상황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건 별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매일 부딪혀야 하니 경험할수록 작아진다고 말할 수 없다. 나 역시 이제야 그럴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다.
모임이 있어 나갔다 왔는데 한 시간 후면 아이가 집으로 온다. 문을 열고 신발을 벗어서 거실에 한 발 내딛는 순간부터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친구의 한마디가 자신에게 어떻게 와닿았고, 교실에서 있었던 편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설명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아이도 엄마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꺼내놓아야 조금 숨 쉬는 법이다. 그때 성심당 순수롤이 생각났다. 2월의 마지막을 달려갈 때쯤 아이들과 첫 대전 여행에 나섰다. 그곳 대학에 다니는 조카 얼굴을 볼 겸 유명하다는 성심당 빵 맛을 경험하고 싶어 떠난 길이었다.
목적이 분명했던 만큼 성심당에 맨 처음으로 갔다. 첫날은 먹고 싶은 빵을 쟁반 가득 담고서 그곳 카페에 앉아서 먹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숙소에서도 빵을 쉼 없이 먹었다. 적당히 달콤하면서도 훌륭한 맛에 가격까지 착해서 우리 모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다음날 집에 오기 전에도 성심당에 들러 빵 쇼핑에 나섰다. 가방 두 개에 가득 담길 정도로 빵을 사 왔다. 그중에서도 순수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남편이 출장길에 사 온 적이 있어 처음이 아니었지만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을 만큼이었다.
“엄마 이거 몇 조각은 냉동했다가 정말 먹고 싶을 때 꺼내자.”
아이의 의견에 그리하자고 해서 냉동실에 꼭꼭 숨겨 두었다. 가끔 아이는 대전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사촌 언니와 지낸 시간과 더불어 성심당에서 맛있는 빵도 먹고, 편한 숙소에서 잠자는 시간이 행복했다고 했다.
외출했다 돌아와서 식탁에 앉았는데 그때가 떠올랐다. 아이에게 좋았던 기억과 함께 한 케이크가 학교에서의 벅찬 하루를 보상해 주기를 바랐다. 어제보다는 기온이 올라가 단단한 케이크는 금세 녹았다.
“노력해서 된다고는 하지만 사람 관계는 그러지 않은 때도 많은 거 같아. 지내다 보면 지금보다는 괜찮은 시간이 돌아올 거야. 혹여 그러지 않을지라도 넌 그만큼 커 있을 거고, 단단 해질 거야.”
아침에도 이런 말을 건넸다. 별 소용없는 어른의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했다. 지금을 건너뛰려 하지 말고 늦더라도 터벅터벅 걸어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말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게 더 많을지도 모르는 아이의 짐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사르르 녹는 빵이 대신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쉬고 나면 다시 신발을 고쳐 신고 나아갈 힘을 얻었으면 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다.
“엄마 친구들하고 요즘 사이가 멀어져서 놀 아이가 없어.”
“그래 어쩌나.”
오랜만에 봄비가 와서 집에서 구멍 난 양말을 깁던 엄마는 내 얘기에 이렇게 답했다. 아마 그때가 처음으로 친구에 대한 고민을 엄마에게 전했던 것 같다. 엄마의 답은 매우 짧았지만 걱정하는 진심이 가득 전해지면서 큰 위로가 되었다. 엄마의 표정과 말이 내 마음과 판박이였다.
그때의 엄마와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집으로 들어서는 아이에게 말했다.
“순수롤 꺼내놨어.”
“진짜! 빨리 먹어야지.”
아이가 어느새 욕실로 들어가 손을 후다닥 씻고 나온다. 아이가 소파에 다리를 쭉 펴고 케이크가 든 접시를 받아 든다. 케이크 한 조각이 주는 찰나 같은 기쁨이 긴 하루를 편안하게 마무리하는 작은 점이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