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회사 산책은 언제나 옳다
산책을 좋아한다. 튼튼한 두 발로 내가 사는 곳 주변을 돈다. 저녁을 먹고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에는 아파트 주변이 단골 코스다. 마음이 더 가는 날은 어스름이 질 무렵 텃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큰 도로 옆 작은 오솔길을 오간다. 그러다 가끔 가보고 싶은 가장 마음에 드는 최고의 산책로는 나주 불회사 가는 길이다. 휴일 아침 하루를 지낼 일을 고민하다 오늘의 목적지로 정했다.
8년 전 깊어가는 가을날 처음 알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니 공기부터 다르다. 한여름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 같은 서늘함에 정신이 맑아지는 상쾌함이 찾아왔다. 일주문을 시작으로 곧게 뻗은 길 대신 계곡을 끼고 있는 산책로를 선택했다. 며칠 전까지 꽃무릇이 한창이었나 보다. 시든 꽃들이 지천이었다.
“엄마 여기 좀 일찍 왔으면 정말 아름다웠겠다. 꽃무릇을 못 봐서 아쉽다.”
큰아이가 내년에 꼭 오자며 다짐한다. 큰 돌 서너 개가 놓인 돌다리를 건너 걷다 보니 아치형의 작은 다리가 나온다. 잠시 쉬어가라고 얘기하듯 마주 보고 있는 4개의 의자가 반긴다. 잠시 앉았다. 오가는 이 하나 없는 그곳은 우리 가족만을 특별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속삭임조차 소음이 될까 마음 쓰게 되는 고요다. 나무 사이를 넘나드는 참새들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리마저 흘려보낸다. 애들이 장난치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같이 함께 있으나 자유롭고 오롯이 걷는 일에 집중한다. 생각들도 하늘에 구름가 듯 흘려보내지는 시간이다.
덕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불회사 주변으로는 삼나무와 비자나무가 군락지를 이룬다. 절로 오르는 길목마다 만나는 나무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다. 이들의 하모니는 신비한 향으로 기억된다. 삼나무의 알싸하면서도 상쾌함과 피부를 깨우는 비자나무의 진한 향은 숲 속의 기운을 담았다.
“파랗다.”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하늘이었다.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나뭇가지의 끝없는 욕망에 언제나 적당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밤의 어둠보다는 태양이 머무는 낮의 환한 공기를 좋아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두가 좋다. 초겨울의 서늘함마저 느껴지는 찬 공기를 느끼며 아무 생각 없이 가다 보면 눈부신 법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사를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다. 공양간에서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나 짐작했다. 가까이 언덕배기 길을 올라보니 아저씨 한 분이 뭔가를 씻고 있었다. 비자 열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저씨 혹시 이 열매가 비자인가요?”
“예, 비자를 씻고 있어요. 이렇게 씻어서 기름으로도 짜고 열매를 까서 먹기도 하고요, 비누도 만들지요. ”
주변에 지천으로 떨어진 열매를 잘 말리기 위한 사전작업인 듯했다. 몇 개의 고무통에 가득 담긴 열매의 향이 코를 자극하면서 주위를 물들인다.
“엄마 머리가 정말 시원해지는 향이에요.”
큰아이가 건넨다. 박하사탕을 한입 물었을 때의 싸한 느낌에 피톤치드 향이 어우러졌다.
대웅전에는 스님 한 분이 염불하고 있었다. 나지막하지만 묵직한 소리가 인기척 없는 주변에 울려 퍼진다. 산의 높이에 따라 초록이지만 다른 결을 보이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아래 동백나무의 진한 빛 그 위는 아마 비자나무 또 그 위는 이름 모를 나무다.
종루에 뭔가 매달려 반짝인다. 올라오는 길에서부터 궁금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절을 찾는 이들의 소원을 적은 메모였다. 우리도 마음의 기도를 적었다. 코로나 종식을 기원하는 막내, 남편과 나는 건강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처음에는 무심코 시작한 일이었다. 얼마 동안 그 자리에서 스님들의 간절한 기도와 함께 머물 거라 생각하니 모든 소망이 다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다시 내려가는 길이다.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올라올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들어온다. 나무 벤치에 앉아서 가져온 커피를 남편과 나눠 마셨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그 풍경의 주인이 된다는 피천득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카페다. 멀리 자전거를 타고 힘들게 오르는 사람이 몇몇 보인다. 집 현관문을 나서 걷다 보면 아픈 몸도 터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도 사라진다.
오늘도 위로를 받고 왔다.
“단풍이 들면 여기 다시 와야겠다.”
몸을 움직이는 일을 즐기지 않는 남편이 불회사 산책길은 다시 오고 싶다고 한다. 함께 할 수 있는 새 친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