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를 살피다
말의 무게가 크게 다가오는 날이 있다. 글을 쓰면서부터는 국어사전을 검색하는 일이 많다. 알고 있는 것들도 실상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럴 때마다 더 정확한 말뜻을 알기 위해 꼼꼼히 읽는다.
물론 그 창을 닫고 나면 다시 잊힐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을 꾸준히 하는 편이다. 그러다 여지(餘地)라는 단어를 찾아보게 되었다. 생활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기억은 별로 없다. 매일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대부분 사라지니 이것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여지는 말 그대로 남은 땅, 혹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나 희망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지가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 순간 가슴으로 캄캄한 암흑이 지나는 느낌이다. 동시에 가슴이 철렁하고 일렁이다 멈췄다.
그렇게 이 단어를 살피다 다시금 여지, 남은 땅에 주목하게 되었다. 땅은 곧 먹고사는 일과 연결되었다.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고, 어떤 사정 때문에 갖고 있던 것들이 조금씩 줄어들 수도 있다.
여지가 없다는 건 곧 삶의 희망이 사라지는 이치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싶다. 타인에게 무엇을 요청했을 때 돌아오는 답이 “다시 돌아볼 여지가 없어요.”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좌절하고 힘이 빠질 것이다.
아주 오래전 회사에서 인터뷰 섭외를 위해서 서너 번 이상은 전화나 메일을 보내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오래 공을 들이다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가 다음 기회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을 때, 여지가 사라진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얼마간 쌓아놓은 공든 탑이 무너진 것 같다. 문제가 해결되고, 이제 현장에서 얼마나 열심히 인터뷰할까를 고민하며, 나만의 스케치를 하는 중이었다. 여지는 어찌 보면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여지를 둔다는 건 지금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가능할 수 있다는 여백 같은 여유다. 그래서 바로 다음 달을 준비하는 잡지에서는 만나기 어렵지만 한두 달을 두고 기다리기로 마음먹는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뵙겠습니다.”
정중한 거절이라는 걸 알지만 여지가 있다.
이런 경우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능성을 두고 다시 노크한다. 지난번에 만나지 못한 경험이 있기에 더욱 절절히 왜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연락한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다 보면 간혹 정말 만나기 어려운 이와 대면할 행운을 얻기도 했다.
가끔 길을 가다 보면 흙을 찾아볼 수 없고 시멘트로 포장된 골목길 한편에 플라스틱 화분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걸 본다. 지금 같은 여름이면 봉숭아가 자라거나 어느 할머니의 부지런한 손길이 지났을 법한 상추가 밥상에 오를 만큼 무성한 풍경을 만난다.
이런 공간에 들어서면 그늘을 기대하기 힘들어 찡그린 얼굴로 걸어갈 때 잠깐 숨 쉬는 기분이다. 화분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여지인 동시에 스쳐 지나는 이방인들의 정서적인 쉼터다.
어떤 단어에 마음이 집중되는 날이면 내가 매일 내뱉는 말을 돌아본다. 누군가 무심하게 던진 그 말이 타인에게 상처가 되고, 내가 그 대상이 될 때도 있다. 무더운 날에는 분명하기보다는 조금 기대할 수 있는 여지의 날들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