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과 좋아하는 것 사이
서늘한 바람이 분다. 며칠 전까지 에어컨을 켰다. 비가 오고 난 뒤 습해서 에어컨 콘센트를 꽂으면서 이제 한두 번만 켜면 끝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때부터 아마 가을이 다가와 있었나 보다.
그날이 집에 에어컨을 켠 마지막 날이었다. 여름이 지나기를 그토록 기다렸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파도가 계속 칠 것 같아도 멈춘다는 것.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떤 것에 집중해 있으면 그것만 보일 뿐 이런 마음을 갖기 어렵다.
여름도 내게 그랬다. 분명 가을이 다가오고, 또 지나면 겨울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온종일 에어컨과 산다고 할 만큼 더운 날씨에 거기까지 바라보지 못했다.
지나고 나면 금방 잊힌다. 이번 여름은 그동안 겪었던 계절 중 가장 강렬했기에 아직은 어느 부분에선 생생하다. 그러면서도 지난 일이 되어가는 게 신기하다.
여름은 멀어져 가고 그 자리를 살랑이는 가을바람이 찾아왔다. 몸이 가벼워진 건 아닌데도 꼭 그런 기분이다. 피부를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에 절로 기운이 난다.
이때쯤 기분 좋게 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이날이 모든 것이 좋은 건 아니지만 이것 때문에라도 잠시 불편함을 뒤로한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과 가을 초입에 아파트 관리실에서 풀베기 작업을 한다.
아파트 주변에 풀이 나 있는 곳을 예초기로 베어내고 주변을 정리한다. 점심때를 제외하고는 종일 이어지는 일이다. 윙 하는 기계음이 계속되니 자꾸 신경이 쓰인다.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귀가 예민해진다.
매일 자동차와 집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 소리는 물론 트럭에 과일이나 생선을 파는 노점상의 외침 등 여러 가지를 듣고 지난다. 그러다 집 가까이서 들릴 땐 싫다.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으면 되지 않냐는 생각이 미칠 때도 있다.
그건 요즘 시골에서도 안 하는 일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이 발동하는 때다. 그러다 풀냄새가 6층 우리 집까지 올라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초록이 지닌 생생함이 냄새에 담겼다. 살짝살짝 지나는 풀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어릴 적 부모님과 과수원 나무 밑을 덮어 놓을 풀을 베러 간 적이 있다. 먼 친척 풀밭이었는데 마른풀에서 나는 은은한 냄새가 지금과는 달랐다. 풀은 까슬거렸고 옷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어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때가 종일 풀밭에 있던 유일한 기억이다. 놀러 간 게 아니라 부모님 일을 도와야 했기에 편하지 않았다. 경운기를 채울 만큼 빨리 일이 끝나서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풀냄새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대상에 대한 느낌은 때때로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거리를 두어야 선명하다. 한 시간을 두 시간처럼 써야 하는 노동의 현장에선 다른 감정이 생겨나기 어렵다.
소리가 방향을 바꿔가며 동네 이곳저곳에서 들리지만 그래도 참을만하다. 그 사이사이에 기분 좋은 냄새가 내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코끝에 다가오는 다양한 기운들은 분명 한 가지 풀이 아니었다. 언뜻 지나다 봤던 풀꽃의 이미지가 잠깐 그려졌다. 이름 모를 풀이 지닌 독특한 냄새가 끝없는 세상 속으로 생겼다 사라진다.
모든 일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것 같다. 시끄럽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으면 종일 불편한 날이지만 그 덕에 풀냄새를 맛보니 실은 좋은 날이다. 풀이 순식간에 흙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톱날이 쉼 없이 움직일수록 풀냄새는 강했다. 내가 얼마나 풀냄새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주 가끔 선물처럼 경험해서 귀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