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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06. 2020

가을에는 가을 무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가을 무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초록 잎사귀에 뽀얀 속살은 한여름 온갖 시련을  견디어 내었다. 동네 중심으로 나가면 텃밭에서 키운 채소 파는 노점을 쉽게 만난다. 가지런히 크기별로 무를 쌓아놓은 곳부터 튼실해 보이는 다발 무도 누군가를 기다린다.     


 요즘 들어 무가 다시 보인다. 시골에서 자란 터라 무는 흔한 식재료였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위에 단골로 등장했다.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싫지도 않았다. 무와 집 간장으로 끓여낸 국의 달콤함이 그립다. 밭에서 자란 무를 채 썰고 끓는 물에 넣어서 만든 단순한 음식이었다. 육수를 따로 내지도 않고 오롯이 물과 무가 간장과 어우러져 내는 맛이었다. 무거운 어떤 것도 끼어들지 않는 담백함이 좋았다. 그리고 엄마의 손이 마법을 부리듯 후딱 버무려낸 무생채가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우게 했다. 엄마는 살짝 식초를 넣었는데 마늘과 식초 고춧가루가 잘 어울렸다.    

  

 매일 밥상을 차린다. 사람들이 말하는 전업주부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고 시장에 나가면 그때마다 나오는 먹을거리에  관심이 간다. 무도 그러했다.  가을 무렵이면 기다려진다. 맛이 강하지 않은 까닭에 어디에도 잘 어울린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 주는 고마운 녀석이다. 특별한 반찬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이만한 게 없다. 그때 단연 1위는 무밥이다. 조리법이랄 것도 없다. 무를 채 썰어서 잘 씻은 쌀 위에 넣어 밥을 지으면 된다. 무에 수분이 많으니 평소보다 밥물의 양을 적게 하는 게 슬기로운 밥 짓기다.  

  

 무를 몰라봤던 시절,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음식이 있다. 정체는 무나물이다.  대학생 시절 선배의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백반을 시켜놓고 맛있게 먹는데 투명하게 하얀 무엇이 있었다. 젓가락을 들어 몇 번 집어 먹으니 아삭하면서도 부드럽다. 고소하다.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을 훔친 반찬이었다. 한두 번 더 달라해서 먹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같이 밥을 먹는 선배도 고개를 저을 뿐이다.  다 먹고 나서는 길에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그거 무나물 볶음이야. 그걸 몰랐구나.”

‘아하’ 속으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요리법에 따라 무가 저리도 변할 수 있다니 놀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가스 불 앞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아줌마가 되고부터는 즐겨 먹는 메뉴다. 그때 기억을 떠올려 채 썬 무에 굵은 천일염을 적당히 뿌려 절인 다음 한 번 씻어 내고 들기름을 살짝 두른 다음 볶는다. 간은 아주 조금만 하는 게 포인트다. 무의 아삭 거림이 소금을 만나 꾸덕해질 무렵 기름에 다시 볶아지는 순간에는 오묘한 맛을 낸다. 식구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진 음식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한 접시다.  


 무는 언제나 튀지 않지만 맛을 풍부하게 한다. 영화로 치면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쯤 아닐까. 날이 점점 추워지는 겨울에는 뜨거운 국물에 이 녀석이 빠질 수 없다. 모두가 좋아하는 소고기 뭇국, 어묵탕에는 약방에 감초다. 무가 듬뿍 들어간 국은 시원하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어릴 적 포장마차에서 파는 어묵탕에는 항상 큼지막한 무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리 흐물흐물 해진 건 아닐 테지만 어스름이 깔리면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이 물러진다. 그러는 동안 어묵 국물은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어묵을 먹기 전에 주인아저씨가 한 국자 떠준 국물 맛은 최고다. 온몸에 온기가 돌면서 행복해진다.     


 지난 토요일 저녁이었다. 일을 보고 집에 와 보니 베란다에 큰 무 한 개와 단감 봉지가 놓여있었다. 아는 언니가 놓고 갔다고 아이들이 전했다. 전화를 걸었다. 

“언니 우리 집에 무랑 놓고 갔어요?”

“응 친정 갔다 오다 저녁 무렵에 뽑았는데 달랑 하나 주기가 그랬는데 한번 먹어보라고.”

허겁지겁 뽑은 느낌이었다. 작은 것이지만 맛보라고 전한 따뜻한 마음이 좋았다. 작은 선물이 밖의 찬 기운을 잊게 했다.


 동네 슈퍼를 지나는데 다발로 무가 주인을 기다린다. 무청은 땅의 온기를 전한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시래기를 만들어 된장을 넣고 자박하게 끓여먹고 싶다. 식탁에 오르는 무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감사한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다. 무 하나로도 충분한 식탁이다. 깊어가는 이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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