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표를 붙였다

by 오진미


귀리, 보리쌀, 흑미, 율무……. 이름표를 붙였다. 내가 아는 잡곡들이다. 검정 네임펜으로 예쁘지 않은 글씨지만 써넣었다. 통 한편에 이름 스티커를 붙이는 순간 그들이 달리 보였다. 단지 밥그릇에 담기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친구같이 다정하고 멋져 보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단지 저마다 가진 이름을 모두가 알라고 써넣은 것뿐인데.’ 그날 이후로 적당한 양으로 덜어 내어 보관하는 것들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이름을 썼다. 국화차, 목련차, 생각차, 매운 고춧가루와 안 매운 고춧가루, 참깨, 들깨 등 모두가 이름을 찾았다.


그러고 한 달이 지나간다. 이제는 무엇을 찾아서 헤매는 일이 없다. 검은색으로 새겨진 이름이 선명히 다가오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쓰고 나서 대충 놔두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능한 다음번 쓸 일을 생각해서 잘 보이는 곳에 가지런히 둔다. 누구의 손에 들리지 않는 이상 움직일 수 없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강차는 손을 베어가면서 부지런히 만들던 내 모습이 보였다. 밀가루는 빵을 만드는 강력분과 부침, 수제비 등에 쓰이는 중력분으로 나누니 상황에 맞게 선택하는 일이 쉽다. 통에 담을 때는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것이며 어떤 영양성분이 있는지도 꼼꼼히 따진다. 많이 먹어서 좋은 일이 없다는 생각도 섰다. 일주일에 세 번 먹었다면 한두 번으로 줄이려는 노력도 절로 생겼다. 저마다 이름을 표시한 까닭에 비닐포장지에서 덜어내 쓰던 이전과는 기분이 다르다. 조심스럽고 정성스럽다.


이름 짓기는 우리 집 베란다 식물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얘들아 우리 집에 식물들이 그래도 꽤 되잖아. 베란다 정원에 이름을 붙여주자. 일주일간 시간을 줄게. 뽑히면 상품은 먹고 싶은 맛있는 빵으로 알았지.”

매일 함께하는 공간이지만 우리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정원 이름 공모를 하고 며칠이 지났다. 막내가 쓴 ‘초록잎 사이에 정원’으로 정했다. 거실 유리문에 비뚤배뚤 써서 종이테이프로 붙였다. 아이는 가끔 누가 볼까 부끄럽다고 하지만 문득 스칠 때면 절로 미소가 흐른다.

“아니야. 이름을 갖게 되면 정말 우리만의 숲이 되는 거야. 괜찮아. 우리 맘인데 뭘.”

나무에도 이름들이 있다. ‘브라운 고’라고 불리는 고무나무, 언제나 정신을 깨우는 향으로 함께하는 ‘그린 골드’ 로즈메리. 봄에 화원에서 데려온 아이라 해서 붙여진 ‘봄도’ 고드세피아, 몇 주 전 가을날 나를 위한 선물로 큰 맘먹고 장만한 ‘가을날 선물’ 셀륨……. 지금까지 참 많은 이름을 지었다. 잊힌 것들도 더러 있다. 아직도 이름을 말하며 언제 무슨 이유로 식물이 우리에게로 오게 됐는지 얘기한다. 가격으로 치면 몇천 원에 불과하지만 식물의 생김새와 그날의 기분, 날씨 등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과 나무가 된다.


갑자기 생각이 스친다. 내 이름을 얼마나 불리고 있지? 이름 석 자보다 누구의 엄마로 불린다. 매일 출근하는 곳이 없으니 내 이름이 불리는 횟수를 헤아릴 만큼이다. 동네 몇몇 아는 이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왜 아이의 이름이 엄마를 부르는 호칭이 돼 버렸을까. 어느 날인가 동네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우리 이제부터 누구 엄마 하지 말고 이름 부르자. 우리부터 이름을 불러야지. ”

“맞아 맞아. 그거 좋은 생각이야. 이름 확인부터 하고.”

그렇게 약속했지만 금세 잊혔다. 다시 제자리다. 엄마들은 종종 이름을 잊고 사는 듯하다. 그래서 자신보다는 집안일, 가족들에게 마음과 몸을 쓰는 일로 일상을 보내는 게 아닐까. 이름을 불러주면 ‘나’를 돌아보는 일에 부지런해지지 않을까. 살다 보면 이름 앞에 누구누구는 어떠하다는 평가와 수식어가 붙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에게 조명받는 유명인이 아닐지라도 그동안의 자취가 따라붙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다. 삶의 목표를 세워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도, 하루를 즐겁게 살자고 마음먹은 이도 모두 저마다의 바람대로 살기 위해 하루를 보낸다. 세상에 막 태어난 아이에게 바람을 가득 담아 기원하듯 잘 맞는 이름을 찾아주는 것도 이런 마음이다. 이름은 남과 나를 구분 짓는 출발이다. ‘나’이기에 모두가 귀하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매일 한편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