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가을에 씨 뿌린 보리가 싹을 틔워 겨울 추위에도 자라고 있다. 마트에 가보니 보리순이 투명 비닐봉지에 적당량 담겨 나왔다. 광주에 이사 오고서야 알았다. 추운 겨울에 보리순 된장국을 먹으며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걸 말이다.
보리는 쌀의 뒤를 잇는 중요한 곡물이다. 어린 시절에는 멀리하고 싶었다. 큰 양푼에 보리밥을 한가득 담고 밥상 한가운데에 놓고 함께 떠먹던 시절에는 그러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보면 아마 내가 다섯 살 즈음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제삿날 먹는 하얀 쌀밥이 최고였다. 그러다 보리쌀에 흰쌀을 조금 넣은 밥을 먹었다.
보리를 베는 5~6월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록이던 보리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밭은 온통 황금색을 이룬다. 보리 이삭의 까끌까끌함은 손이 닿는 곳이면 온몸으로 향할 만큼 신경이 쓰인다. 짚으로 엮어서 만든 넓은 패랭이 모자를 질끈 동여 쓰고 갈옷을 입은 동네 아줌마들이 일렬로 앉아 호미를 들고 보리를 베어나갔다. 햇살이 어찌나 따가운지 절로 옷은 땀범벅이 되었지만 쉴 틈 없이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보리는 부지런함과 어려웠던 시절의 삶을 상기시키는 그런 것이었다.
아이는 어른이 됐고 그리 반갑지 않았던 보리가 좋아하는 것이 되었다. 흰밥보다 이것저것을 함께 섞은 밥이 좋다. 여기에 보리도 빠지지 않는다. 특유의 쫄깃한 식감과 더불어 혈당을 조절하고 위와 장을 따뜻하게 보호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이왕이면 건강한 밥을 먹고 싶은 까닭이다.
보리쌀은 보리밥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음식에도 종종 활용된다. 몇 년 전 양림동 한 레스토랑에서 소꼬리 리소토를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보리가 쫄깃한 고기와 만나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했고 따듯한 느낌의 음식이었다. 그 후로 리소토를 가끔 만들었다. 집에 있는 버섯이나 새우 등 특별한 재료가 없이도 가능했다. 이번에는 연어가 남아 있었다. 열심히 손을 조몰락거려 보리쌀을 씻었다. 지난여름 어느 날에 만들어 먹고 참으로 오랜만이다.
리소토는 시골 정감이 묻어나는 보리에 이국적인 향이 묻어나는 음식이다. 복잡함 없이 적당히 쌀을 불리고 재료를 섞어서 충분히 익혀내면 끝이다. 보리에 버터와 올리브유 등 외국의 식재료가 더해져 만들어 내는 조화가 어색한 듯하면서도 불편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스며들어 맛있다.
아이들에게 보리가 특별하게 다가온 건 리소토다. 쌀과는 달리 오도독 탱글탱글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자칫 죽처럼 부드러워질 수 있는 맛을 보리쌀이 살아나게 한다. 30분 정도를 불려놓기로 했다. 여기에 조금 남아 있는 연어도 준비해 놓았다. 연어에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를 조금 뿌리고 재워두었다. 마늘 몇 조각을 까고 편으로 썰었다. 통통한 양파도 잘게 다져 놓았다. 큰아이가 베이컨을 넣어 달라고 주문한다. 언젠가 먹방에서 본 게 생각났나 보다.
오목하면서도 넓은 면이 있는 냄비로 하기로 했다.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볶다가 양파를 넣었다. 눌어붙지 않게 잘 저은 다음 보리쌀을 넣었다. 쌀이 잠길 정도의 적당한 물을 넣고 약한 불로 익힌다. 센 불에 하게 되면 금방 졸아들고 달라붙어 제맛을 찾기가 힘들다. 오고 가며 다른 일을 하다 저어주면 된다. 어떤 음식은 정신없이 만들기에만 몰입하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는데 이건 그런 무리함이 없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이 주어지는 듯하다. 한 20여분이 지난다. 보리쌀이 부풀어 오르고 한 입 먹어보니 탱글탱글한 보리알이 통통 튀는 공 같다. 이제 연어 스테이크를 준비할 차례다. 팬을 올리고 불기운이 올라오면 연어 조각들을 올려놓았다. 자꾸 뒤집지 말고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한 번씩만 위치를 바꿔주는 게 고기가 으스러지지 않고 모양과 맛을 유지하는 비법이다. 베이컨도 마지막으로 채 썰고 볶아준 다음 리소토가 담긴 팬에 넣고 저어주었다.
그릇에 적당히 담는 과정만 남았다. 아이들은 어느 때처럼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 하루 중 이 시간처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없을 것만 같다.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황홀한 맛이라고 합창한다. 노르웨이의 연어가 함께 하기에 풍성한 식탁이다. 흔히 먹는 조기나 고등어, 갈치와는 다른 느낌이다. 올리브가 더해져 연어의 풍미 가득함이 오랫동안 머문다.
내가 경험한 보리와 아이들의 추억은 다른 모습으로 퍼즐을 만들어 간다. 나는 여름 기운을 조금씩 알아가는 뜨거운 태양 아래 보리가 익어가는 밭에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고, 가끔 조천 바닷가 옆에서 초록 물결을 일렁이는 5월의 보리밭을 떠올린다. 우리 집 아이들은 보리를 이탈리아 쌀 요리인 리소토로 기억될 듯하다. 무엇이든 좋다. 다가오는 5월에 마음을 빼앗길 청보리밭 드넓은 푸른 바다를 보여줘야겠다. 보리에 대한 특별한 날이 더해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