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를 먹으며
종로 김떡순을 추억하다

# 16

by 오진미


방학이 끝나간다. 며칠이 지나면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와 선생님을 만난다. 집에만 머물렀던 겨울방학이 마법처럼 사라진 기분이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오르던 메뉴들도 이제는 힘을 잃어간다. 그만큼 집밥을 고집한 날이 많았다.


아이들이 떡볶이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아침부터 막내와 피부과와 치과를 돌았다. 가끔 얼굴 주변으로 두드러기가 생기는데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좀 심해진다 싶으면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온다. 지난주부터 흔들리던 오른쪽 아랫니도 뽑기로 했다. 아이는 치과에 가는 게 언제나 두려운 일인가 보다. 병원 문 앞에서부터 긴장한다. 다행히 이가 많이 흔들리는 까닭에 마취 없이 간단히 빼냈다. 그리고 동네 서점을 들러 큰아이 수학 문제집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니 한 시간이 지났다.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다.


앞치마 끈을 질끈 맨다. 다시 시작됐다.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를 끝낸 뒤 정확히 3시간 반이 지났을 뿐이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 굵은 멸치를 넣고 끓인다. 냉동실에 둔 떡국떡을 양푼에 담고 물에 불린다. 어묵을 크게 썰었다. 초록은 언제나 음식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대파도 어슷 썰었다. 어제 다진 마늘도 조금 꺼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랑크 소시지도 끓는 물에 대쳐 놓았다.


맛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을 다툴 이유도 없다. 그냥 천천히 순서대로 재료들을 넣으면 그만이다. 부담이 없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몸 또한 가볍다. 떡볶이는 그랬다. 언제 먹어도 특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밥과는 확실히 구분된다. 떡을 국물에 콕 찍어서 고추장 양념이 적당히 배어든 채로 입에 넣으면 쫄깃하면서도 말랑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다. 어묵은 적당히 달아서 떡과는 다른 분위기다. 자칫 질릴 수 있는 맛을 중간에서 잘 중화시켜준다.


오늘 떡볶이는 평범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무리 없이 들어갔다. 망설이다 라면사리까지 더했다. 이름은 떡볶이지만 모여라 꿈동산 같은 떡과 친구들의 조합이다. 라면이 익을 즈음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큰 그릇에 담았다. 넘칠 정도로 꽉 찼다. 이 많은 것을 누가 먹을까 싶을 만큼 상당한 양이다.


떡볶이 산이다. 식탁에 앉았는데 덩그러니 떡볶이만 올려진 게 왠지 미안하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젓가락을 열심히 든다. 아이들은 소시지와 라면에 눈이 간다. 후루룩후루룩 면치기 소리가 들린다. 다 끓여갈 즈음에 마늘을 넣은 게 신의 한 수였다. 알싸한 마늘맛이 국물을 달큼하면서도 질리지 않게 한다.


그 많던 것을 누가 먹었을까 싶다. 금세 그릇이 비어 간다. 떡 몇 조각이 그릇에 남았다. 그것마저 누가 먹으니 정말 깨끗이 비웠다. 떡볶이 한 그릇이 점심을 평정한 셈이다. 여러 가지를 만들지 않아도 되니 평화가 찾아왔다. 한 끼는 훌륭히 끝낸 느낌이다. 평범한 게 위대하다는 걸 이럴 때 써도 괜찮을 것 같다. 특별히 모양 나고 예쁘지 않아도 좋다. 제시간에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만족이다. 오늘 떡볶이가 그랬다.


아이들 방학이면 두세 번은 떡볶이를 만든다. 밥이 지겨워질 즈음에 간단한 먹을거리로, 때로는 정말 떡볶이가 그리워서 꼭 먹고 싶은 날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 만만한 게 떡볶이다. 문득 20대 종로에서 먹던 포장마차 떡볶이가 생각난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건 ‘김떡순’이다. 김밥, 떡볶이, 순대가 함께 어우러진 그것은 환상이었다. 밥을 대신해서 김밥이 속을 든든히 해 주었고 순대는 빨간 떡볶이 국물에 스며들어 쫄깃하면서도 독특한 맛을 선사했다. 추운 겨울,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 한 그릇 안에 담긴 그것은 최고의 음식이었다. 떡은 호호 불어야 할 정도로 뜨거웠고 여기에 어묵 국물을 주는 주인아줌마의 센스까지 더해지니 온몸이 따듯해졌다. 내게 김떡순을 알려준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수년이 흘러간다.


집에서 먹는 떡볶이는 그 맛이 아니다. 그냥 엄마표 보통 떡볶이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하고 절로 물을 부르는 강한 맛은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함이었다. 가벼운 주머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짧은 시간에 후다닥 먹을 수 있는 까닭에 오가며 먹을 수 있는 최고의 메뉴였다. 아이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라도 그 풍경을 그릴 수 있을까? 아이들의 떡볶이는 어른이 된 후에 어떻게 기억될까. 오늘도 떡볶이로 추억의 그림을 하나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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