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돈가스 김치찌개
안개가 자욱하다. 비가 제법 내렸는지 웅덩이가 생겼다. 막내와 초등학교 도서관 가는 길에 마주한 아침은 조금 부풀려 봄기운이 흐른다. 습하고 포근하다. 찬 공기가 잠깐 얼굴에 와 닿지만 나쁘지 않다. 잔뜩 흐린 꾸물꾸물 한 날씨는 누군가를 찾게 된다.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착한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다. 기대를 품고 집안일을 하는데 연락이 왔다. 어제부터 새로 배우는 게 있어서 오늘은 어렵다고 했다. 그리 큰 기대를 한 것도 아니지만 혼자 실망이다. 잠깐의 설렘을 뒤로하고 아이들과 또 하루를 잘 보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언제나 돌아오는 시간이다. 어제와 같은 하루지만 분명하게 구분 지어 주는 건 밥이다. 우리 애들에게 겨울방학의 점심은 하루를 위한 강력한 에너지다. 방학임에도 학원에 가야 하는 큰 아이와 코로나로 밖으로 나가는 게 어려워진 막내에게 주어지는 작은 위로다. 아이들에게 멋진 공간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일상을 눈앞에 펼쳐 놓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가끔 충격요법은 아이를 성장시켜주는 밑거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요즘이다. 그야말로 집콕하는 게 지혜로우면서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이 되어버렸다.
엄마의 시간이 돌아온 셈이다. 난 그리 친절하지도 착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엄마다.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고 천둥 벼락 치듯 마음이 왔다 갔다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엄마야’라고 할 수 있는 건 밥이다.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매일 아침마다 물어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다 보니 초등생 시절부터 국적 없는 나만의 요리에 도전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요리 전집을 서너 번 독파했다. 책을 읽는다는 기분보다는 당시에는 보기 힘든 다양한 색깔의 음식 풍경들을 즐겼다. 어떤 멋진 곳보다 아름다웠다. 아마 그때부터 몸에 힘을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는 게 음식을 만드는 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 주를 정리하는 금요일, 엄마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부엌에 섰다.
“오늘 돈가스 나베 어때?”
“응 엄마 오늘 날씨에 딱 어울리는데요. 그걸로 해요.”
유명 음식점에 예약을 하듯 아침 10시에 이미 점심은 약속되었다. 초밥과 돈가스를 파는 동네 식당에서 그것을 처음 맛보던 날이었다. ‘이쯤이야 나도 하겠다. 여기에서 이걸 먹기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황당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날 이후 가끔 국물이 생각나는 날에, 기름을 적당히 품은 칼칼한 찌개가 그리울 때는 식탁에 오른다. 90퍼센트 정도 맛이 보장되는 까닭에 손쉽게 할 수 있다. 직접 돈가스를 만들어서 하기보다는 마트에서 파는 냉동 돈가스를 이용하는 까닭이다. 시판 돈가스는 평균의 맛을 잘 조합해서 만들었기에 밋밋한 맛을 순간에 끌어올리는 마법이 있다. 여기에 묵은 배추김치만 있다면 망설일 필요 없는 한 그릇 음식이다.
“엄마 난 김밥 먹고 싶은데. ”
며칠 전부터 김밥 노래를 부르던 막내가 심술이 났다. 풀 죽은 목소리다. 아무리 간단히 준비한다 해도 밥부터 새로 해야 했고 재료 몇 가지를 준비하려면 그래도 시간이 필요했다. 날씨 때문인지 몸 컨디션은 엉망이었기에 귀찮았다.
“응 오늘은 어렵겠는데, 우리 주말에 해 먹자. 아빠도 있을 때. 알았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내가 힘들 땐 이상하게 음식도 제맛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할게 아니라면 내일로 미루는 게 맛난 음식을 먹는 나만의 방법이다.
한 그릇의 밥을 먹기까지 두 아이의 마음을 잘 조절해야 한다. 파스타, 떡뽂이, 라면 등 먹고 싶은 게 같은 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종종 있다. 이때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선택하는 건 내 맘이다. 아이들의 의견을 물으면서도 결정은 내가 하는 꼴이니 어찌 보면 민주주의를 포장한 독재일 수도 있겠다. 설령 처음엔 자신의 생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늘어놓다가도 식탁에 오른 음식으로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비결이다.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만이 자만심일 수도 있겠다.
언제나 같은 일이다. 멸치 다시마 육수를 준비했다. 냉동실에 남은 돈가스 3조각을 꺼내어 압력팬에서 굽는다. 에어프라이도 있지만 압력팬에 아주 조금의 기름을 두른 다음 약한 불에서 하는 게 불맛을 느낄 수 있어 종종 이용한다. 묵은지를 꺼내어 적당한 크기로 썰고는 살짝 헹궈준다. 오랫동안 김치통에서 머물렀기에 깔끔한 맛을 내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육수에 김치를 넣고 중간 불에서 끓이기 시작한다. 아삭한 김치보다는 살짝 무른 것을 좋아하기에 시간을 오래 두기로 했다.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언젠가 떡볶이를 만들 때 썼던 떡이 남았다. 걸쭉한 국물 맛을 위해 떡도 조금 넣었다. 여기에 달콤한 맛을 위한 양파를 적당량 채 썰었다.
돈가스가 노릇하게 익었다. 가위로 적당한 크기로 잘라 김치 위에 얹어준다. 그러고 나서 5분 정도 더 익혀주면 완성이다. 그냥 돈가스 김치찌개라는 말이 더 좋겠다. 돈가스가 올라갔을 뿐 모든 게 김치찌개 끓이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간은 참치액으로 맞췄다. 엄마의 정성이 들어간 집간장도 좋지만 자칫 짠맛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바다 맛을 주면서 감칠맛을 더해져 풍미를 좋게 한다.
방학기간 점심은 식탁 대신 십여 년이 지난 작은 상에서 먹는다. 티브이를 보면서 먹을 수 있기에 아이들이 고집한다. 처음에는 식사예절을 생각하면 별로라고 생각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냥 즐겁게 먹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부터 점심은 세월이 묻어간 그 상에서 이루어졌다. 어찌 보면 소박하고 한편으로 너무 먹을 것이 없어 보이는 점심이다. 달랑 찌개와 밥뿐이니 말이다. 한 그릇에 야채와 고기가 적당히 섞였으니 다른 게 필요 없다. 나물이나 다른 걸 올려놓아도 아이들 손이 가지 않는다. 설거지를 줄이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지만 괜찮다.
“엄마 국물이 맛있는데. 이런 날씨는 이 맛이야.”
역시 먼저 국물을 잔뜩 머금은 돈가스에 젓가락이 간다. 국물을 호호 불면 엄마와 딸의 밥상이 빛난다. 복잡하지 않게 단순함이 음식에도 힘을 발휘한다.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내 생활을 답답해하고 있을 무렵 밥상이 나를 깨웠다. ‘난 오늘도 밥을 잘해 주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