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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계의 최고의 클래식을 뽑는다면 이거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고 만드는 일조차 간단하다. 복잡한 게 싫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마땅한 먹거리가 없다면 언제나 이 말을 한다.
“우리 계란으로 밥 먹을까”
계란 프라이가 될 수도 있고 계란말이, 스크램블 에그, 계란찜 등 계란 관련 요리가 범주안에 놓인다. 무엇인 됐든 짧은 시간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으니 그것 하나면 만족이다. 밥 먹을 게 없다고 투덜대다가도 이것만 있으면 한 그릇을 뚝딱하고 비운다. 참 고마운 녀석이다.
요즘은 왜 이리 비가 잦았는지 모르겠다. 며칠을 사이에 두고 또 비가 내린다. 봄을 재촉하는 느낌이다. 포근하면서 많지 않게 소리 없이 내리는 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면서도 모든 게 귀찮다. 편하게 널브러지고 싶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모든 걸 간단히 하는 게 좋다. 먹는 일도 포함이다. 뭘 먹고 싶은지 묻는 일도 귀찮다. 행여나 예상 밖 답이 나오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재료를 다듬고 썰고 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은 멀리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계란말이를 얘기한다. 한시름 놓았다.
계란 5개를 꺼냈다. 볼에다 탁탁 깨트린 다음 우유를 조금 넣었다. 다시마 물을 더하면 은은한 부드러움이 좋지만 그것마저 오늘은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소금을 넣고 잘 섞이도록 저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물을 부은 다음 양옆으로 모양을 만들어 간다. 여기에 체다 치즈를 세 조각내어 길게 펼쳐놓았다. 약한 불로 여유를 두고 모양을 만든다. 넓은 팬으로 한 까닭에 도톰한 모양은 일찍부터 단념해야 했다. 계란말이 하나가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계란을 다시 팬에 넣고 두 번째 말이를 만들었다. 끝이다. 너무 간단해서 괜스레 미안해진다.
계란은 어떤 재료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여러 얼굴로 변신한다. 당근이나 양파 파 등을 잘게 다져 넣으면 야채 계란말이가 완성되고 시금치와 버섯 파프리카 등 집에 있는 야채들을 먼저 볶은 다음 계란물을 부어서 구워주면 프리타타라는 이탈리아식 오믈렛이 탄생한다.
아이들은 계란말이를 앞에 두고 돈가스 소스에 찍어 맛있는 점심식사를 한다. 어릴 적에는 계란말이가 지겨웠다. 반은 밥이고 반은 반찬을 넣었던 도시락 한편을 차지한 게 계란말이였다. 거기에 김치면 끝이다. 분홍색 소시지를 싸 온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계란물을 살짝 입힌 소시지 반찬은 점심시간의 왕이었다. 일 년에 그런 반찬을 싸고 가는 일은 손에 꼽았다. 엄마가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던 날이었다. 언제나 도시락을 지켜준 건 계란이었다.
영양소의 완전체라 할 만큼 계란은 시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사랑받는 식재료다. 요즘은 조류독감 영향으로 외국산 계란이 수입됐다는 뉴스를 듣기도 했다.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이젠 계란도 아껴서 먹어야겠다는 사연을 보내기도 했다. 그나마 가장 편하게 냉장고를 지켰던 계란마저 마음 놓고 못 먹는 상황이 되어가니 안타깝다. 그럼에도 다른 무엇보다 가성비 높은 계란은 포기할 수 없는 반찬거리다.
어느 날 동네 반찬가게를 들렸다. 하얀색 스티로품 포장 용기에 아주 도톰한 계란말이가 담겨있는 게 아닌가. 충격이었다. 계란 요리는 집에서 해 먹는 최소한의 음식이라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그 집 계란말이가 맛있다고 멀리서도 사러 온다는 동네 친구의 얘기를 들었다. 바쁘면 사다 먹을 수 있지 하면서도 순간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리 정신없이 살아야 하는 삶이 안타까웠고 한편으로 계란말이를 살 수 있는 여유가 부러웠다.
집에서 닭을 키우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집 뒤 우영밭과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던 닭들은 정해진 곳에 알을 낳기보다는 마음대로 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아이였던 나는 닭들의 동선을 잘 알고 있기에 이곳저곳을 다니며 계란을 하나씩 모아들였다. 아버지가 먼저 싱싱한 계란을 톡톡 껍질을 깨서 영양제처럼 먹었고 나머지는 집안의 소중한 살림 밑천이 되었다. 지금은 정말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언제든 냉장고에 계란만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밥하기가 지겨워지는 그날에 나를 구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