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가능성
최근 아빠와 오빠가 함께 운영하는 사업이 어려워졌다. 함께 일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나빠지던 아빠와 오빠의 관계가 언젠가 박살이 났고, 지금은 간신히 살얼음 같은 평화를 유지 중인데, 사업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그마저도 어렵게 될 판이다.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고 하니, 뭐 어떻게 해결을 보겠지 싶지마는 아빠와 오빠의 관계는 심히 염려가 된다.
이번 달에 칠순을 맞이한 아빠에게, 나는 이제 그만 쉴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을 슬쩍 꺼냈다. 스트레스받으면서 잠 설치는 일은 이제 그만하시고, 평화롭게 지내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내가 볼 때, 아버지가 손에 쥐고 있는 몇 가지 프로젝트들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이제 그만 놓아야 할 타이밍 같았다. 상당량의 대출금 이자가 매달 나가고, 마이너스 통장은 끝을 모르고 불어나고 있으며, 해당 산업의 침체기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이대로라면 지금껏 잘해오시던 사업이 너무 안 좋게 끝날 것만 같았다. 이쯤에서 발을 빼시는 게 아빠에게도 오빠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며칠 후, 아빠의 칠순을 기념한 가족 모임에서 촬영된 동영상 하나를 받아 봤다. 해외에 거주 중이라 참석하지 못한 나를 위해 친척동생이 보내준 영상이었다. 영상 속 아빠는 말씀 중이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제 좀 조용히 쉬어야겠다 생각했어요. 칠십이 되었으니 이제 충분히 했다. 할 만큼 했다. 다 내려놓아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길에, 갑자기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100세 시대라는데,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도전해 봐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계속해보려고 합니다. 잘 지켜봐 주세요."
나는 순간 반감이 들었다. 아빠가 너무 과욕을 부리시는 것 같았다. 솔직히 조금 지긋지긋 하단 생각도 했다.
.. 어느덧 우리는... 잠재력 없는 생물체가 되어 있다. 이제는 누구도 우리에게 '뭘 하고 싶으세요?'라고 묻지 않는다. (...) 이룬 바를 이미 계산당하고 저울질당한 노인들은 폐품 판정을 받는다.
-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책을 읽다 이 문구를 마주하고, 뜨끔했다. 조금 거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빠를 폐품취급 한 게 아니었나. 아빠 앞에 닥친 난제를 당사자인 아빠가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싶으신가를 궁금해하기보다는, 사업에 ㅅ도 모르는 주제에 이제 그만 손 떼시라는 말 먼저 했다. 아빠를 위하는 척하며 내뱉은 그 말속에는 기만이 숨겨져 있었다. 이제 그만 무대에서 내려갈 나이 아니냐는, 건방진 생각이 깔려 있었다.
아직 더 이루고 싶은 목표가 아빠에게도 있을 것이다. 이 위기를 슬기롭게 견디고 극복해서 어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싶으실 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그저 괴롭기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빠를 응원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오빠가 조금 더 오래 괴롭겠지만, 이 사업은 처음부터 아빠가 일군 것이고, 당연히 일터에서 떠나는 날을 선택할 권리도 아빠에게 있다. 그 누구도 아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