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안강 하곡마을, 300년 은행나무 아래서 만나는 가을의 품격
바닥은 노란 카펫처럼 물들고, 머리 위는 황금빛 우산이 펼쳐진다. 어느덧 늦가을, 한 해의 마지막 빛깔을 품은 은행잎이 조용히 바람에 날리는 계절이다. 그 속에서 특별한 한 그루를 찾아 나섰다.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마을의 수호신처럼 자리 잡은 나무, 약 300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누군가는 "너무 보고 싶어서" 해마다 이곳을 찾는다 말하고, 누군가는 그냥 그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돌아선다. 사람을 부르는 이 나무, 과연 어떤 이야기와 계절을 품고 있을까?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303번지, 하곡리 회관 앞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단순한 풍경 그 이상이다. 1982년 10월 29일, 경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22m, 둘레 6.4m에 이르는 위용을 자랑한다.
서원이나 재실 옆에 심긴 나무들이 흔한 가운데, 이 나무는 마을 한가운데, 하곡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으로 존재한다. 그 자체로 하곡의 역사이자 정서이기도 하다. 계절과 관계없이 그 곁에 서면, 말없이 무언가를 품어주는 느낌이 든다.
특히 11월 초~중순에는 잎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절정의 장관을 이룬다. 나무 아래 쉼터와 정자, 피크닉 테이블이 마련돼 있어 마을 주민과 방문객 모두가 쉬어가는 장소로도 사랑받는다.
호젓하게 즐기던 풍경, 이제는 늦가을 나들이 명소로 예전에는 조용히 혼자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입소문을 타고 늦가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단풍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유명 관광지처럼 붐비지 않아, 은은하게 퍼지는 단풍의 멋을 고요히 즐기기 좋은 곳이다.
은행잎은 떨어졌을 때도 운치 있는 풍경을 만든다. 마치 노란 융단처럼 바닥을 덮은 잎 사이를 걷는 느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으면, 아래위로 황금빛에 물든 순간이 그대로 프레임에 담긴다.
올해는 주말마다 나들이객들이 줄을 잇고 있고, 평일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 하곡을 찾고 있다. 하곡리 회관 앞 공터에 주차가 가능해 접근성도 뛰어나며, 입장료 없이 상시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편하게 들를 수 있다.
성산서당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단풍 산책과 함께 역사 탐방까지 즐길 수 있는 점도 이곳의 큰 매력이다.
하곡리 은행나무는 단지 가을 풍경의 배경이 아닌, 깊은 상징성과 이야기를 품은 존재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의 대사성 윤탁(尹倬)은 “뿌리가 깊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라고 하며 성균관 명륜당 앞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이후 유교적 의미를 담은 나무로써 향교와 서원마다 은행나무를 마주 심는 전통이 생겼다.
하곡리 은행나무 역시 이런 학문의 상징인 ‘행단’의 연장선에서 읽힐 수 있다. 실제로 하곡마을은 과거 선비가 터를 잡았던 유서 깊은 마을이며, 서원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강당부락’으로 남아 있다.
은행나무가 단순한 경관용이 아닌, 마을의 정체성과 뿌리 깊은 정신을 지탱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나무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정신적 상징성은, 황금빛 단풍 그 이상의 감동을 준다. 단풍 아래를 걷다 보면, 단순한 풍경을 넘어 우리 삶의 균형, 배움, 인내와 같은 본질적인 가치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경주 하곡리의 은행나무는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 여행지를 넘어, 시간과 역사를 품은 살아 있는 존재다. 수백 년을 견디며 마을을 지켜온 이 나무 아래 서면, 계절의 아름다움은 물론 삶의 깊은 위안까지도 전해진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11월 초중순, 아직 가을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다. 관광객으로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된 가을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경주 안강 하곡마을을 추천한다.
조용히 물든 은행잎 아래에서, 바쁘게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보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이 늦가을의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