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집어삼킨 되다 만 성숙함
그놈의 부부의 세계…
처음에는 뭔가 싶었다. 수강생들과 친구, 지인들까지 질문과 이야기가 많아서.
사실, 사랑과 관계는 현실에 존재하기에 경험을 기반으로 해야 배울 수 있다.
드라마가 담고 있는 것은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 낸 로맨스 판타지이기에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로맨스 드라마는 지극히 비현실적인데다가 불필요할정도로 자극적이어서, 감정과 애착 등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를 비틀어놓는다. 그래서 연애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하고, 간접경험을 했다는 착각까지 하게 만들어서 잘 안 보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의 세계는 로맨스라기보다는 현실적인 파멸의 이야기인지라, 막장 중의 막장.. 오히려 왜 관계나 사랑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분석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의 삶이, 관계가 무엇때문에, 어떻게 틀어지는지는… 겪지 않고 배울 수 있고, 또 그렇게 배워서 피하는 게 낫다. 그게 간접경험의 의의이기도 하고.
수강생들의 질문 중 지선우의 애착에 대한 질문이 제일 많았기에, 후발주자로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하면서 그녀의 애착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다들 머리카락에 하루 종일 꽂히고, 병원 일을 내팽개친 채 남편을 미행하고, 삶이 통째로 흔들리게 내버려두는 걸 보면 불안형이 아니냐고.
지선우의 애착은, 오히려 안정형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남편의 불륜이 그녀의 멘탈을 아작내기 전까지는
지선우의 사랑은 다정하고, 아름다웠고, 따뜻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의 사랑을 바라보며 기쁨에 전율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완벽한 운명의 반쪽이라고 “믿었다”.
믿는 도끼는 발등을 강하게, 여러 번 찍었다.
지선우는 이태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부부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불안과 외로움에 점철되어 남자를 의심하던 극도의 불안형 애착을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로 눈앞에서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해 안달이 나지도 않았고, 머릿속의 망상으로 인해 제멋대로 남자의 외도를 상상해서 다그치지도 않았다.
시작은 별 거 아니었다.
립스틱을 본 뒤에도 남편이 한 설명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기에 넘겼다. 그녀가 예민해지고, 관계에 몰입하게 되며, 일상에 영향이 가기 시작한 때는 여러 가지 단서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부터다. 남편의 말과 행동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과 어긋나는 게 속속들이 드러나고, 보지 말아야 할 장면들을 보고, 발견해서는 안 될 물건들을 발견하고 …
객관적으로 명백한 단서들이 나타나자 지선우는 증거를 기반으로 외도의 가능성을 정교하게 ‘평가’한다. 다른 가능성들을 제거해 나감으로서.
When you have eliminated the impossible,
whatever remains, however improbable, must be the truth.
불가능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진실이다. - 셜록 홈즈
지선우의 행동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불안형들과 다르다.
객관적으로 외도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관계의 당사자가 보이는 감정적인 반응과 행동은 불안형이든 안정형이든 상관없이 지극히 정상적이다. 신뢰와 유대감을 기반으로 쌓아온 깊은 관계가 뿌리채 뽑힐 위험에 처해 있는 마당에 무덤덤하게 ‘머리카락이 나왔구나,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구나.’ 하면 오히려 그 부부관계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애초에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불안형들은 애착 대상과의 감정적 거리를 느끼고 거리를 ‘줄이기 위해’ 감정적인 행동들을 보인다. 목적 자체가 지선우와 다르다. 지선우가 이태오의 여다경에 대한 감정의 크기를 재보는 이유는 단순히 사랑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이 상대방의 행동을 용서하여 향후 가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평가하기 위함이라면, 만약 동일한 상황에서 불안형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면서 떠 보는 연기를 하는 목적은 내가 불륜녀보다 더 사랑받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나는 너를 질투하고 있으니까.
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그런데, 너는 어떤지 모르겠으니까.
지선우가 안정형이라는 증거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자주 보이는 특징이 있다.
갈등 상황에서도 본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관계 위주로 생각한다는 점이 그렇다.
이태오가 요양원에 방문하는 걸 외도로 오해했을 때, 그녀는 바람을 피우는 줄 알았다며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외도를 100% 확정지은 후에도 그녀는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상대방이 먼저 관계를 파탄내는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용서할 의향이 있으며, 관계 유지를 위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지선우는 성숙한 인간인가?
… 아니다.
지선우는 자신의 결핍과 욕망을 상당 부분 외부에 의존한 채 살아간다.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완벽한 평판,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 남편의 잘생긴 외모, 동시에 남편보다 우월한 사회적 지위에서부터 오는 안정감, 만족스러운 문제라고는 하나도 없는 삶 …
지선우의 유토피아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한다. 이상적인 틀을 갖추어 놓고, 벗어나는 부분은 어떻게든 끼워 맞추면서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평가 대상은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하며, 평가 항목은 갈비를 먹다 흘리는 일상적인 행동에서부터 자신이 느낀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당연히 아들도 함께 느껴줘야 한다는 개인의 사고방식까지 해당된다.
지선우는 완벽한 세계에서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성적이지 못한 게 당연한 상황에서도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로 남으려 했다.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믿었던 주변의 모두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아도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려 했다.
적어도 이태오가 마지막 기회를 부술 때까지는 그랬다.
지선우의 동화 속 세계는 이태오가 마지막으로 외도를 부정함과 동시에 완전히 깨졌다.
남편은 용서해줄테니 고백하라고 한 순간까지도 거짓을 이야기하며 외도를 부정했다. 이는 지선우에게 있어 함께 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말과도 같았으며 관계에 대한 최후의 부정이기도 했다.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고, 밀려오는 절망은 그녀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산산조각냈다.
왜,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됐을까?
결국 그녀는 몸서리치게 끔찍해하던 이태오와 주변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추락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지자, 지선우는 무너진다.
복수는 자기파괴와, 타나토스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었다.
비극은 파멸을 낳았다.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하고, 아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지키려고 애썼던 사회적 위치는 흔들리며, 주변 사람들은 등을 돌린다.
기만과 폭로가 난무한 가운데 상처뿐인 승리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듯 보였다.
화라
당신의 애착을 위한 클래스를 진행중입니다. :)
https://brunch.co.kr/@temptationz/20
https://taling.me/Talent/Detail/22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