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가 구체적으로 정해지고 나면,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준비생'이라는 호칭을 달고 함께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다. 준비 과정이 혹독할수록 한때 같은 시공간을 점유한 이들과의 유대감과 동지애는 더욱 커진다. 그런 감정들은 훗날 사회에 진출했을 때 호혜적인 관계의 초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준비생들끼리 나누는 건 그런 좋은 감정뿐만이 아니다. 자신보다 더 빨리 준비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더 멀리 뻗어나간 이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질투 어린 마음이 생긴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언론인을 꿈꾼 지 어언 일 년이 다 돼간다. 인턴, 아카데미, 스터디에서 만난 인연을 합치면 한 마흔 명 정도 된다. 몇 명은 벌써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형 언론사에 합격했고, 나머지는 여전히 티격태격 좁은 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인턴 동기들 중 네댓 명의 합격소식을 들었다. 방향을 틀어 증권사에 합격한 동기도 있고, 메이저 언론사에서 수습기간을 보내고 있는 동기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저널리즘 아카데미 수강생 중에서도 취업에 성공해 나간 이들이 더러 있다. 예의상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덤덤하게 합격을 알리는 메시지들. 그런 메시지가 올 때마다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있는 힘껏 축하의 말을 전하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질투심. 인정하긴 싫지만 내 안에도 그런 감정이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에 뒤처질수록 더욱 커지고 있었다. 졸업까지 한 학기만을 남겨두고 있다. 내게도 공채에 지원할 자격이 생겼지만, 정식기자가 되려면 최소한 반년은 더 준비해야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합격소식을 듣게 될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마음이 문드러지게 둘 순 없었다.
불안이나 두려움 등은 그 작동기제를 말과 글로 풀어내는 방법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한다. 본격적인 언시 준비를 앞두고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 질투심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우선 제일 쉬운 방법부터. 인터넷에 검색했다. 질투: 잘 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함. 합격한 동기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했다는 말엔 쉽게 동의가 안 되지만, 일단은 그렇다 치고. 사전적인 정의는 감정이 유발되는 상황을 통해 의미를 잘 정리했지만,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에 대한 단서는 없었다. 단순히 나보다 잘 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기 때문에 싫은 건가. 설명이 부족하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잘난 사람을 다 질투해야 한다. 이재용, 트럼프, 조코비치, 엄마 친구 아들 등등.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힌트는 내가 질투를 느낀 이들을 나열하며 얻을 수 있었다. 언론사가 공시한 합격자 명단에는 내가 아는 이름도 있었고, 내가 모르는 이름도 있었다. 나는 당연히 내가 아는 이름을 질투했다. 지난해에도, 재작년에도, 그 언론사는 합격자 명단을 올렸다. 또래 여자애들 중에는 2018년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도 분명 있었을 테다. 다른 언론사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은 질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질투 리스트'에 오른 이들의 공통점은, 한때 나와 같은 출발선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인턴 과정을 밟을 때만 해도, 우리는 모두 기자직을 지망하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저널리즘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을 땐 모두 고만고만한 '도토리'들이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처지는 엇갈렸다. 누구는 기자가 됐고, 누구는 여전히 지망생으로 남았다.
우리는 왜 질투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질투는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같은 출발선에 섰던 이들이 저렇게 성공했다는 건, 뒤집어 보면 나도 저들처럼 노력했다면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나는 절박하게 노력하지 않았고 결국 지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 (물론 상황적인 한계도 있지만) 나는 저들이 선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 책임은 온전히 내게 있었다. 삶의 격차, 게으름의 대가가 명확하게 눈앞에 드러났을 때 밀려드는 건 자기혐오의 감정이다. 노력하지 않은, 그래서 충분히 손에 쥘 수 있었던 열매를 놓친 나는 얼마나 한심한가. 따라서 나는 질투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질투: 잘 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사람 때문에 자신이 미워짐. 본질적으로 자기혐오와 다르지 않은 감정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공한 이들이 '공연히 미워지는' 감정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앞에선 부인했지만, 내게도 그런 마음이 분명 있다. 어렸을 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성공을 볼 때마다 '내가 나중에 저 나이가 되면 더 잘할 수 있어'라며 위안을 삼곤 했다. 그럴 수 없는 요즘에는 은연중 저들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이처럼 자신을 향한 싫증이 남을 폄훼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중심에 자존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일수록 남을 시기하는 건, 마음속에 자기혐오를 받아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내 탓을 해버리면 한심한 자신의 모습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까봐. 일종의 방어기제로써 주변에 가시를 돋치게 되는 거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그런 감정을 채찍으로, 동력으로 삼는다.
질투는 자기혐오로부터 낮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다. 물론 나는 심리학자가 아니고, 따라서 궤변처럼 들릴 순 있으나, 나는 이게 질투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라 생각한다. 결국 남은 취업준비 기간 동안 멘탈을 단단히 잡으려면 자존감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뻔하고 진부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조언한다. 운동을 꾸준히 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라고. 특히 감사와 만족은 모든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라는 말도 있다. 자책할 이유도 많지만, 그걸 모두 상쇄할 수 있을 만큼 감사한 일도 많다. 방황이 길었지만, 정말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찾았다. 나이는 많지만, 나름 차별화된 이력을 쌓았다. 몇 번을 실패해도 변함없이 응원해줄 이들이 곁에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